무라카미 하루끼(유유정 역,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청송 권규학
일본에서 6백만 부의 판매 기록을 세운 빅 베스트셀러인 이 책 '상실의 시대'는
오늘을 사는 젊은 세대라면 꼭 한 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몇 년 전에 한 번 읽었던 책으로써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었지 싶다.
지금껏 이순(耳順)의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나름대론 많은 책을 접했다고 자부하면서도
같은 책을 두 번, 또는 세 번씩 읽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어보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던가,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리고 '삼국지'를 포함한 유명한 작품들을 그래도 제법이나 재독(再讀),
삼독(三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책 무라카미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란 책 역시 두 번 읽은 책 중의 하나이다.
불과 몇 년 전쯤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전연 생소한 듯한 이 책을 발견하고, '상실의 시대'란 조금은 특이한 제목에 이끌리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삶 속에서 허덕이는 현대인들의 상실감이 불현듯 떠올라
읽은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미리 한 번 읽었던 책이 이토록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서는 것일까.
얼핏얼핏 그 부분적인 내용들이 기억되곤 했지만,
전반적인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는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인데…,
이 책에서 이렇듯 기억에 없는 부분이 많다면 결국 다른 책을 읽었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왠지 나의 독서방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고,
또 나름대로 고민을 안겨준 그런 책이기도 하다.
'나오코'와 '와타나베'와 '기즈키', 그리고 '하쓰미'와 '와타나베'와
'나가시와'와 '돌격대', '레이코 여사'와 '미도리'…!
이 책의 전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나오코'와 '기즈키'는 연인사이이며, '기즈키'와 '와타나베'는 둘도 없는…,
아니, 둘밖에 없는 친구이다.
16, 17살의 한창나이에 셋은 종종 어울려 다녔다.
셋은 누가 누구 하나를 불편해 하지도 않았고, 못마땅해 하지도 않았으며,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에 일말의 질투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요즘 유행하는 '그냥 친구' 정도 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나오코'와 '기즈키'는 어렸을 적인 서너살 때부터 같이 자랐고, 그 둘은 자연스레…,
지극히 자연스럽게 연인사이로 발전한 케이스다.
그렇게 평화롭게 잘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기즈키'의 자살로 '와타나베'가
느낀 죽음은 '삶의 대극(對極)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18살 5월의 일요일에 중앙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나오코'…!
가냘프고 어딘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들고, 말을 할 때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고
항상 진지해지고 머리 한 쪽엔 핀을 꼽고 있으며, 갑자기 말문이 막히면 그 핀을
긁적거리는 버릇이 있는 '나오코'.
'나오코'와의 산책이 잦아지면서 '와타나베'는 '나오코' 를 사랑하게 되고,
'나오코'도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좋아하고는 있다고 느낀다.
둘은 20살의 생일을 함께 보내고 그날 밤 관계를 맺지만
갑자기 '나오코'가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진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나오코'가 편지로 '와타나베'를 초대한다.
'나오코' 가 있는 곳은 '아미료 요양원'이었다.
조용하고 자율적인 장소…, 이 '아미료 요양원'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책을 읽는 나 역시도 한번쯤 가서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싱한…, 정말 맛난 야채도 먹어보고 싶고…,
또 그런저런 고민거리없이 하루하루를 짜여진 마스트 플랜에 맞게끔…,
그렇다고 그 계획이 빡빡하게 나를 조여오지도 않는…,
그런 생활을 딱 몇 개월만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정말이지 너무나 강하게 덮쳐왔다.
그렇다고 꼭 무슨 병이 있어서라면 이런 마음이 들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아미료 요양원'에서 만난 '레이코 여사'…!
'나오코'는 '기지키'의 죽음 이후 많이 혼란한 상태였지만,
그 이전에 친언니가 자살하고부터 패닉상태(공황상태 : 恐慌狀態)였던 것 같다.
그런 상태는 '기지키'와 함께 하면서 많이 자제가 됐었는데,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고 믿었던 그 '기지키'마저 자신을 떠나버린 후,
'와타나베'에게서 '기지키'의 모습을 간간히 보아왔는데 '기즈키'와는 다르게
'와타나베'는 순간순간 '아…! 와타나베는 기즈키가 아니었지…,'하는 정도를 깨닫고
다시 패닉(공황 : 恐慌)상태로 빠져버린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 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자신에게서 '기즈키'의 향수를 느끼는 '나오코'임을 알면서도 사랑하며
어떻게든 '나오코'의 심신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와타나베' 앞에 나타난 '미도리'…,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자신의 감정에 너무나도 솔직한 여자, 거침없이 섹스가 좋다고 말하는 여자…,
그리고 자기를 생각하면서 마스터베이션(手淫)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그런 여자…!
결국 '와타나베'는 이 두 여자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고민한다.
자신의 이런 감정이 참 못된 감정이라고…, 나쁜 행동이라고 스스로 자책도 한다.
'나오코'를 사랑하면서…, 지금 '나오코'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도
'미도리'에게 끌리는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가 두 번 째로 '아미료 요양원'에 다녀간 후에
상태가 많이 악화되고 결국엔 자살을 하고 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 번 째의 자살이다.
'나오코'의 언니, '기즈키'…, 그리고 '나오코'…,
'나오코'의 자살은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온전할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되는 것일까?
'나오코'는 죽기 직전.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와타나베'의 편지들을 모두 불사른다.
그건 곧, '와타나베'와의 관계를 가슴 속에 묻어가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지…,
'나오코'의 자살로 인해 '레이코 여사'는 '아미료 요양원'에서 완전히 나오게 된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자취방에서 갖는 4번의 정사…!
'와타나베'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나가시와'의 연인인 '하쓰미'와 셋이 종종 어울렸다.
우연의 일치로 '하쓰미'도 결국엔 자살을 했다고 짤막하게 나와 있다.
어떤 관계일까?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작가는 왜 '하쓰미'와 '나가시와'의 사이에 '와타나베'를 또 끼워넣은 것일까…?
'레이코 여사'를 배웅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미도리'가 묻는다. '당신 지금 어디 있어요?'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고 그는 답한다.
이 책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나오코'가 특히 너무나 좋아해서 '레이코'에게 청할 땐 1백엔씩 지불했던
바로 그 비틀즈의 노래이다.
'상실의 시대 = 노르웨이의 숲'
'와타나베'에겐 '나오코'를 알고 그녀를 사랑했던 17살에서부터 21살까지가
자신의 무언가를 잃었던-콕 찍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상실의 시대'였지 않았을까 ?
그리고 '나오코'는 영원히 '노르웨이의 숲'으로 가버린 것일까?
이번에 다시 읽은 이 책 '상실의 시대'는 좀 길고, 지루한 글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곧바로 소감을 작성하곤 하는데
오늘은 책장을 덮자마자 마음먹고 연필과 백지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이 짧은 건지…, 단순한 건지…, 아니면, 나만의 사색이 깊은 건지…,
난 가끔은 깊은 선입견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또 한번 뒤통수를 얻어맞고, 나의 사고는 박살이 난 것이다.
'상실의 시대'란 이 책은 퀴즈 프로그램의 문제로도 많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난 이것이 사회서(社會書)나 사상서(思想書)쯤 되는 줄 알았던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읽고나니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야기였는데 말이다.
최근 몇일…, 아니, 지금도 나는 '후텁지근한 여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외친다.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난 수년 동안 충분히 힘들었고, 더 이상 고통에 이겨낼 자신감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그럴 때 우연히 책장에서 한 번 읽은 바 있는 이 책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래 힘든 내 감정을 삭히려면 남의 것이라도 빌려 풍덩 빠져보자!'는 마음으로
일단 '상실'이라는 단어에 난 동감을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낀 사실은
소설작품이 아무리 허구를 꾸며나가는 문학의 한 장르라고는 하지만,
결국 그 허구도 진실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란,
허구를 현실처럼 만들어 내는 거짓말장이지만, 그만큼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이 감상문을 솔직하게 쓰고 싶다.
일단 이 책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끼를 어떤 말로라도 칭송하고 싶다.
그가 '해변의 카프카'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일본이 아끼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주인공 '와타나베'는 이제 겨우 20살의 청년이다..
그런데 작가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27살의 청년처럼 젊은 감정을 숨김없이 말했고,
20살의 '와타나베'는 나이답지 않게 훨씬 성숙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20 ~ 30대 시절의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면,
난 30 수년의 삶을 결코 숨기지 못할 것이다.
철없는 20 ~ 30대처럼…, 아니, 젊음을 닮아갈려고 억지를 쓰는 우스운 꼴이라는 거다.
그런데 작가는 그 예민한 나이의 벽을 서슴없이 무너뜨렸기에 그가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최근 뉴스를 통해 음주 경험이 있는 청소년이 50%를 넘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나에게 있어선 이미 40수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와 지금이 별반 다를 바가 없다.
40수년 전 내가 청소년 시절이었을 때도 음주 경험 있는 아이들은 50%를 넘었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난 이미 오래 전에 그 '고독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20대의 그나 나…, 또 다른 누구나…, 어느 누구라도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무조건 같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것에 위안을 느낀다.
솔직히 주변의 친구들도 모르는 일이 있다.-혹은 알지도 모르겠다.-
난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연애다운 연애란 걸 한 번도 못해봤다.-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색했고, 목메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면 꼭 무슨 별종 같았다.
그러던 내가 불혹의 중반에 한 사람을 알게 되었고, 이순(耳順)을 넘긴 시점에 이른 지금,
사랑이란 단어가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지독한 그리움이었고,
그 모양새가 '와타나베'와 '나오코'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가 가정을 이루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아니, 이루어져서는 안 될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 사람을 통해 내 등에서 날개가
터져 나올 것 같은 환상에 젖어드는 기분을 숨길 수도 없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기에 '나오코'의 연락없이도 묵묵히 참아나가는 '와타나베'를 통해 나를 보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나약한 모습에서도 역시 나와 남자의 본능을 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가 옆에 있다면 웃으면서 위로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나와는 조금은 다른 경우겠지만 만약 나의 아내가 '나오코'처럼
불현듯 나에게서 영원히 멀어질 수도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두렵기만 하다.
그렇게 난 이 글을 보면서 나도 그녀도…, '와타나베'와 '나오코'도…,
또한 젊은이들 모두가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누군가 삶과 죽음은 반대말이 아니라 동전의 이면과 같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그건 틀림없는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반반의 확률이다.
살지 않으면 죽은 것…, 죽음은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정말 살아 있음을 짐스럽다고 느꼈을 때, 불현듯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늙어서 병으로, 아니면 사고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나약'이라는 명찰을 산 사람의 세상에 남길 수도 있고,
살해라는 처절한 죽음으로 다른 이의 손에 내 삶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
이건 완전한 게임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4명의 인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내가 '와타나베'라면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스스로를 버리는 원망과
주변에 산재되어있는 죽음의 두려움에 견디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돌파구를 쉽게 찾아간다.
배신감…?
처음엔 그랬지만 나 또한 그랬을 것이요,
내가 먼저 떠난다면 남겨둔 사람이 그렇게 되길 기원해봤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과의 공간을 만드는 주인공을 통해
죽음이란 끝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끔 29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기형도 시인이나
31살의 전혜린같은 이름있는 문인들을 떠올리듯이…,
이 글을 읽으면서 너무 동물적인 표현에 약간은 당황하기도 했다.
마치 와따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에서 느꼈던 느낌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림을 맛보았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은 성에 대한 욕구에서 대충 '그러려니…',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개방적이고 또 그 개방적인 행동을 간접적이나마 인정받는다.
하지만 여성들은 성적 욕구에서 구속되고 통제받을 뿐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운 섹스의 욕구를 참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가끔씩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글의 작가가 남자이기에
여자들의 성 개념에 대해서는 제3자적 입장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이 성적표현이 자유롭지 못해 천대(?)받는 듯 하지만
사랑을 전제로 한 섹스는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사랑의 표현은 곧, 섹스로 이어지는 것이니깐….
하지만 성을 지나치게 불건전한 행위로 취급한다던가…,
노리개로 생각하는 무분별한 성 윤리는 어처구니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소설에 나오는 '미도리'의 거침없는 성의 표현은 저질로 취급받기도 한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비록 여자라고해도 참고 견디며 괴로워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궁금한 것은 알아보고, 원하는 것은 하는 것이 바람직하리란 생각이다.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심각한 편협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도미시마 다께오의 '여인추억'이나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과 같은 소설작품에서
너무 지나치고 과격한 성적표현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과격한 성문화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본'이라는 왜곡된
개인적 생각은 접어주기로 했으며, 독자들 역시 그리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것은 완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는 조선시대에도 반드시 있었을 테니까.
가끔 나는 핵심을 잃어버리고 주변에 침체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건을 들고 거실로 뛰어나왔는데,
나와 보니 내가 왜 수건을 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책이 그랬다.
이 책 '상실의 시대'는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훑고서야
오만한 나의 궁금증을 겨우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 궁금증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상실의 시대', 도대체 뭘 상실했기에 '시대'라는 막중한 시간적 단위를 붙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한 번 읽어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주마!'하는 오기의 발동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레이코 여사'와의 정사에서는 약간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미도리'에게 '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아무데도 아닌 공간의 한가운데에서 미도리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 상실이라는 것이 아마 막판에 길을 잃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 소설작품을 요약해서 정리해보자.
이건 순수한 나의 생각일뿐…, 맞고 맞지 않고를 넘어서서
독자들 스스로가 평가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첫째, '과거에 대한 상실'이다.
'기즈키'없이는 외톨이일 것 같았던…, '나오코'없이는 사랑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와타나베'는 '나가사와'라는 친구…, '미도리'라는 새로운 사랑…,
그리고 '레이코 여사'와의 정사에 이르기까지 빈번한 여성편력을 보인다.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늘 과거에만 머무를 수만은 없는 것인가 보다.
둘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상실'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방황하기 마련이고,
나 또한 경험했듯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허무인지 배워나가는 그 시기에
완전한 자아는 상실된 상태일 것이다.
셋째, '두려움 또는 겁에 대한 상실'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갑자기 우리가 흔히 쓰는 속어인
'겁대가리 상실'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와타나베'로서는 아직까지 20살의 어린 나이이기에 정착된 것이 없다.
그러기에 여러 사람과의 섹스에서도 책임이 없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책임이 없으며, 사회적 위치의 책임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이나 겁없이 그는 그렇게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오는 자유를 소유했을 것이다.
넷째, '주변인에 대한 상실'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시대적 배경은 아니고,
순수한 '와타나베'의 개인적인 상실의 시대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을 3 ~ 4년 사이에 잃었으니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상실의 시대, 사랑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 영원한 안식처, 마음의 안식처'
여기에서 '와타나베'는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은 잃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은 상실하지 않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그 공간에 말이다.
아마 이런 점이 작가가 바랐던 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을 다시 읽고 어떤 문학적인 비평을 떠나 나름대로 찡한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마음 아픈 사랑 하나쯤은 가슴 속에 묻고 산다'는 문구가 갑자기 떠오른다.
가슴 아픈 사랑, '생각하면 싸아~한 느낌에 정말로 가슴이 미어진다'라는 게 뭔지
느껴지는 사랑…, 혼란스런 사랑…, 그 당시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많은 걸 잃었을
그런 사랑…!
사람은 누구나 이런 사랑하나쯤 기억 속에 묻고 살 것이다.
또 하나…, 난 이 책을 통해 정말 흥미와 재미로움을 얻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 시원하게 웃지는 못했지만
'와타나베'와 같은 남자가 되고 싶었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허용되는 행위를 만끽하고도 싶었고,
또 더 이상 외롭지도 않고 싶었다.
나만 그런 '상실의 시대'에 버려진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어쩌면 인생은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상실'을 반복할 지도 모른다.
그 '상실'이 반복되다 보면 그게 바로 '상실의 시대'가 아닐는지…,
하지만 그 '상실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즉 스스로의 몫인 것 같다.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본다.
복잡한 생존경쟁과 삶의 고통에 시달리다보면 자기 자신을 잊게 되고,
또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그랬듯이 사랑이란 언제 어느 때고 소리없이 다가선다.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이 이 책을 읽고
나름대로 가슴 찡한 사랑을 나누기를 바라며, 뜻있는 사람들이 읽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