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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서 평

이문열의 '들소'

    이문열의
    
    '들소'를 읽고
    
    
    이문열 !
    과히 이 시대 최고의 작가라고 추켜세워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한 
    그의 작품을 다시 또 접하는 순간 작은 떨림을 느낀다.
    거침없이 엮어내는 그의 작품활동에서 열정과 끈기를 본다.
    아니, 식을 줄 모르는 그의 몸놀림에서 거친 사나이의 정력을 느낀다.
    그가 써 온, 앞으로도 쓸 숱한 작품들에게서 느꼈던 소중함을 
    이 책 '들소'에서도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가길 기대하며 첫 장을 넘긴다.
    그림을 그리거나 문양을 새기는데만 관심이 있는 그는 산악 씨족사회의 부족민들의 대부분이 바라는 
    '용사'가 되는 것에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다.
    결국 이름을 얻는 성년식에서 소를 사냥하다가 <비겁한 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역시 성년식에서 이름을 얻은 <큰 목소리>와 함께 불구자들이 모여 일하는 <손의 동굴>로 들어가 
    남들이 사냥한 동물의 찌꺼기나 받아먹는 처지에서 무늬를 넣는 방법을 배우지만 
    자신은 몹시 그림을 그리고 싶어한다.
    그러던 중 약삭빠르게 사냥에서 공헌을 세운 <뱀눈>이라는 자와 자기가 짝사랑하던 <초원의 꽃>이 
    우연히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본 후, <뱀눈>에 대한 증오심이 커져간다.
    그도 <초원의 꽃>을 차지하고 <손의 동굴>을 빠져나가려고 사냥에 나가 공헌을 세우려고 하지만  
    또다시 <소에 짓밟힌 자>라는 칭호를 얻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열렬하게 쫓았으나 한번도 잡지못한 들소를 자신의 선과 색을 통해 잡으려고 한다.
    <위대한 어머니>로부터 평원지방 사제자의 후손임을 알고부터 <신비의 동굴>로 들어가 
    <큰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여 <손의 동굴>에서보다 후한 대접을 받고 지낸다.
    그리고 틈만 나면 동굴 벽에 들소를 그린다.
    일찍이 평원지방을 돌아 본 <큰 목소리>로부터 그곳의 풍요와 지혜를 들은 후 동경을 하게 되지만
     <큰 목소리>는 엄숙하게 말한다.
    『나는 거기서 매우 불길한 조짐을 보고 왔어.    
    권력이..., 인간이 인간을 명령하고 강제하고 학대할 수 있는 힘이 발생하고 있었어.     
    몇몇 힘세고 영리한 소수가 조직과 폭력으로 어리석고 약한 다수의 동료 위에 군림하려고 획책하고 있었어.     
    아무런 반대급부없이 동료의 생산을 빼앗고 대가없는 노동을 강제하려고 했어.
    또 나는 보았어.     우리의 목소리가 치명적으로 타락하고 악용되는 것을..., 
    신화는 함부로 만들어지고 용자나 영웅은 조작되었어.     
    거기다가 더욱 나쁜 것은 그런 권력이 점점 더 소수의 사람에게 몰리는 경향이야.      
    나는 실제로 그곳에서 겪은 적이 있어.      
    단 한 사람을 위해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피를 쏟고 땀흘리는 땅을..., 생각해봐. 
    그 땅이 얼마나 끔찍한 땅인가를... 』
    그의 스승이 죽고 <뱀눈>이 하늘의 목소리를 부정하며 
    그와 <큰 목소리>에게 협조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큰 목소리>는 <뱀눈>의 의도를 안다.
    엄청난 힘과 조직의 탄생을, 그리고 도전할 수 있는 절대자로서
    <뱀눈>이 그 위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제안을 수락한 그는 자주 보내오는 질좋은 고기와 과일들에 대해 감사해 했으며, 
    그런 감정의 반복이 <뱀눈>에 대한 희미한 복종감으로 변질돼 간다.
    축제 때 마다 <뱀눈>을 영웅화시키는 일이 많아졌으나 
    그는 별 저항없이 <뱀눈>과 함께 하며 원하는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러나 <신비의 동굴>에서 <큰 목소리>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불길한 변화를 막을 동지가 되어 달라고 부탁받는다.
    사냥실력은 최고지만 <뱀눈>에게 항상 공헌을 빼앗기는 <붉은 노을>이 가세하면서 
    <큰 목소리>의 패거리들은 세력이 커지지만 <붉은 노을>이 <뱀눈>의 모함에 죽음을 당하자
    세력이 점점 줄어들더니 <큰 목소리> 또한 죽음을 당하자 그는 자신의 무력함과 비굴함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계속 소를 그려 나간다.
    자연집단인 <뱀눈>의 혈족이 전투조직으로 변하고 혈족을 통합시키면서 세력을 키워가지만 
    그의 눈에는 <큰 목소리>의 예언이 적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투에 승리할 경우에도 피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죽은 자의 침묵과 살아남은 자의 탐욕으로 더 많은 전리품을 얻게되고 
    여자들 마저 남성의 소유물로 전락하게 된다.
    불확실한 사냥과 일시적인 약탈로는 조직을 유지할 수 없게된 <뱀눈>은 
    애초 목표였던 초원으로의 진출을 꾀한다.
    그러나 전처럼 용이하게 정복할 수 없게되어 싸움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뱀눈>은 유목민 중 가장 강력한 부족과 화평을 맺고 징표로 <초원의 꽃>을 보낸다.
    <초원의 꽃>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슬픔이 어떠냐는 질문에 아무런 동요없이 대답한다.
    『사람은 현란하게 꾸며진 말을 벗기면 모두 저마다의 소를 쫓고 있을 뿐이예요.
    <뱀눈>은 권력의 소를 쫓고, <달무리>는 그 <뱀눈>이 나누어 주는 부귀의 소를 쫓는 식으로..., 
    그런데 제가 쫓는 소가 무엇인지 아세요 ?       그건 풍요와 안락의 소예요.     
    그리고 <뱀눈>을 좋아한 것도 그가 바로 그것들을 줄 수가 있기 때문이죠.    
    물론 당신처럼 무엇을 쫓는지 얼른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죠.      
    당신은 그림을 그려주고 <뱀눈>으로부터 고기와 가죽을 얻고 있지만 
    그게 바로 당신이 쫓는 소가 아닌 것은 분명해요.
    당신은 뭔가 다른 소를 쫓고 있는데 물론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소보다 훌륭할테지만 
    사실 그것은 잡을 수 없는 환상의 소예요.      
    당신은 당신이 내게 보내 준 그 오랜 애정을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아세요 ?       
    그러나 내게도 당신의 진심이 몇 번이나 가슴저리게 와 닿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철이 들면서 나는 알았어요.     당신은 나와 다른 소를 쫓고 있고, 
    그 소는 아마 이 세상에선 잡히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서 당신의 인생은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걸.      
    내가 당신을 피한 것은 바로 그런 당신의 운명이었어요.
    만약 우리가 힘들어 먹이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애써 이 땅 위에 더위와 추위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당신을 나의 짝으로 선택하고 사랑했을 거예요.
    그러면 나도 당신처럼 환상을 사랑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만 추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반드시 환상이 깨어지게 되어 있고, 
    아름다움과 진실도 필경엔 한 토막의 고기보다 못하게 되어 있어요.』
    <초원의 꽃>을 떠나보낸 후 그는 견딜 수 없이 음울한 마음으로 지낸다.
    그러던 중 그는 깨닫게 된다.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그림은 
    하나의 종속적 가치로서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가 새로운 추구의 대상으로 찾아낸 것은 그림 그 자체, 
    표상된 선과 색의 완전성을 가지는 가치였다.       
    그러나 갑자기 떠나온 산록과 <신비의 동굴>이 그리워짐을 느낀다.         
    그는 이상한 열정으로 몸을 떨구며 몇 가지 도구를 챙기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뒤로하고 <신비의 동굴>로 향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작가가 무엇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지 정확히 끄집어내지는 못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 작품에서 의도하는 바는 곧, 
    <큰 목소리> 또는 <초원의 꽃>이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작가가 또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중에서도 <초원의 꽃>이 한 말이 작가 자신의 숨겨진 메시지라는 생각이 짙지만 
    <큰 목소리>가 했던 말 역시 간과할 수는 없다.
    소수에 집중되어 있는 경제적 편중으로 빈부의 격차가 커진 것을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군데군데에서 표출되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 자를 게으름뱅이나 무능한 자로 비판하고, 
    자신들의 근면과 인내를 과장함으로써 그 불평등을 합리화시키는 것을 말이다.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그 막대한 소유는 우연한 행운이나 비열한 수단, 
    또는 탈취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그 불평등을 해소해야할 시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지금까지 나의 소를 잡으려 한 적이 있는가 ?'
    문득문득 '나의 소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40대 중반을 넘긴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는 나 스스로가 던진 이러한 질문에도 
    적당한 대답이나 결론을 찾아내지 못했다.
    일반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쫓으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이 작품 속의 '그'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찾고 자기만이라도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아무도 일아주지 않는 그 뭔가를 해야할 것인지......, 
    <초원의 꽃>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인 바탕이 없이 자기의 이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砂上樓閣), 즉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새롭게 인식한다.
    우리 속담에 '사람은 제 먹을 복을 타고 태어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요즘 세상은 먹고 살기조차도 바쁜 세상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2%의 가진 자들이 우리 전체 국민들의 40%에 해당하는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가슴아픈 사실을 접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슬픈 심사를 한탄하면서도 
    단지 메스컴에서 떠들고 있는 일부 있는 자들의 돈 씀씀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 2%의 가진 자들은 아무런 걱정없이 그들만의 소를 쫓고 있을테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뒤로한 채 
    자기의 소를 잡으러 가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러한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니,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낼 여유조차도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금 속해있는 이 자리에서 부족하나마 가진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실현하기 힘든 자신의 꿈을 찾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본능적인 욕구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앞으로의 삶이 계속될 수 있을지가 우선 걱정스럽다.    
    아무튼 이 책을 덮으며 글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그 새로운 느낌(?)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음에 
    다행함을 느끼며, 이런 깊이있는 작품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중에서 찾을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깊이있는 작품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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