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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자작글

유월의 단상(斷想)-전원(田園) 보고서-

 

 

유월의 단상(斷想)-전원(田園) 보고서- / 청송 권규학

 

 

햇살이 뜨겁다. 뜨겁다 못해 온몸을 따갑게 파고든다.

얼굴은 붉게 변하다 못해 새까맣게 그을리고,

햇살에 노출된 몸뚱이의 온 곳에 보풀이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용띠해(甲辰年)의 반이 지난 유월이다.

다니던 직장 일도 마무리를 했으니 다시 또 백수(白手) 신세,

덕분에 아침나절은 여유롭게 지내지만, 금세 무료해진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장만한 900여 평의 농장,

그곳에 갈 때면 뜨거운 태양도 주춤, 순간적이나마 열을 감춘다.

전혀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이 또한 마음이 짓는 나만의 느낌이리라.

 

집에서 10여 분쯤…, 촌락을 벗어나 야외로 가는 길은 늘 즐겁다.

진한 풀내음에 섞인 시큼한 소똥 거름 냄새마저도 향기롭다.

과수원이라고 할까, 그냥 힐링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복숭아나무 30여 그루, 감나무 50여 그루…, 빈 공간에 호박 여섯 구덩이,

울타리 쪽엔 연꽃 닮은 토란과 키다리 옥수수가 사이좋게 자라고,

밭고랑엔 방울토마토와 오이가, 물 고인 고랑엔 돌미나리가 키재기를 하는…,

오늘은 시장 종묘상에 들러 고구마 모종 2판(100여 포기)을 사서 심었다.

어제 하루 비가 내렸지만 다시 물을 뿌리며 잘 자라길 기대한다.

복숭아 열매는 어느새 탁구공 만큼이나 굵어 수확을 기다리고,

감꽃을 떨군 청도 반시감은 사각 얼굴을 드러낸 채 배시시 웃고 있다.

수확한 작물을 판매하여 많은 수익을 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푸른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다.

비실비실하던 잎싹들에 물을 주고 다음 날 다시 찾았을 때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일어서서 반기는 출렁이는 푸른 작물을 보면

마치 나 자신의 모습인 양 신이 나고 자신감이 충전된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새삼 실감한다.

 

승용차의 트렁크(뒷좌석)는 농기구 창고이다.

삽, 괭이, 호미, 낫, 모종삽, 쇠스랑, 갈구리, 삼태기, 기타 등등,

잡다한 농기구들이 즐비하고, 농사용 장비들이 가득하다.

장화로 갈아 신은 후 밭고랑을 돌며 일을 할 때면

구슬 같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없다.

과수밭고랑엔 나무가 일으키는 바람이 신선하다.

문득 후드득 비가 쏟아진다. 뭘까, 소나기인가.

'좋지 않은 일은 소나기처럼 온다', '소나기는 피하는 게 좋다'는 말이 생각나서

피하려다가 그냥 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노라니 금세 잠잠해진다.

문득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영상이 떠오른다.

윤 초시댁 증손녀와 소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비를 맞아 병을 얻어 죽어가면서도 소년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윤 초시댁 증손녀의 티 없이 맑은 마음이…!

대장동이니, 대북송금이니, 세 여사를 포함한 이런저런 특검이니,

영일만 유전개발이라는 메가톤급 뉴스와 아전인수적 정쟁(政爭),

세상은, 정치판은 시끌시끌 혼탁의 극대치를 치닫고 있지만

그저 자연에 묻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그나마 살만하다.

가끔은 문학 속 주인공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듯 몽환에 빠져들 수도 있기에

 

오늘 하루도 종일토록 농장에서 유유자적했다.

유유자적이란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땀을 흘리며 일을 해도

힘들다거나 고달프다거나 짜증스러움이 없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갈퀴로 쉴 새 없이 돋아나는 잡초를 긁어내고

빈 공간을 찾아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내고,

그러다 보면 언제인지도 모르게 하루라는 시간이 세월 속으로 숨어든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릴 즈음

흐트러진 농기구들을 챙겨 싣고 귀가(歸家)를 한다.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찬물에 샤워를 한 후 막걸리 한 잔에 끼니를 때운다.

백수(白手) 아닌, 백수(白手)의 하루는 마냥 즐겁다.

지루하고 짜증 나고 지겨워도 그저 즐겁고 유쾌한 마음을 갖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노라면 삶도, 인생에도 즐거움이 따르지 않을까 싶다.(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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