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승학산에서 / 청송 권규학
승학산*에 여름이 묻어왔습니다.
파릇파릇, 억새 싹에 푸름이 덧붙어졌습니다.
억새 사이로 칡넝쿨이 손등의 정맥처럼 구불구불 얽혀있습니다.
억새와 칡넝쿨, 칡넝쿨과 억새의 오랜 동행(同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침묵으로 상대를 인정합니다.
억새를 흔들며 부는 바람에 땀 냄새가 묻어납니다.
어느새 소소리바람*이 떠난 억새 숲엔 하늬바람*이 주인행세를 합니다.
여름이란 계절을 반기는 나무도 여럿 있습니다.
자드락* 산책로를 따라 산의 주인인 소나무를 비롯하여
편백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생강나무가 잎을 키웁니다.
쪼롱쪼롱, 산새들의 노랫소리도 귀를 즐겁게 합니다.
데칼코마니로 붙은 계곡 사이
작은 너덜 아래, 또랑또랑 물 흐르는 소리도 정겹습니다.
알던 길은 아는 곳으로 낯선 길은 낯선 곳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의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감히 이곳까진 쫓아오질 못했습니다.
가슴을 막았던 호흡을 단숨에 불어냅니다.
비울 수 없던 마음 안 갈등의 찌꺼기들을 맘껏 토해놓습니다.
군데군데 재선충에 침몰당한 소나무의 주검이 눈에 띕니다.
잘려나간 팔다리 위로 송골송골 피가 맺혀있습니다.
소나무의 상처를 안아주려고 갈참나무가 팔을 벌립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느라 또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을까요?
생각이 골똘하다 못해 마음이 답답할 때면 숲을 찾습니다.
숲은, 산은 우리 사는 세상처럼 각박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서로 갈등하지 않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상대를 인정하며
오순도순 어울려 수분지족(守分知足)의 삶을 사는 풀꽃과 나무와 숲 속 친구들!
정녕 세상사의 온갖 시름이며 잡다한 시시비비를 덧없음으로 만드는 숲,
우리 사는 세상이란 숲도 승학산의 억새숲처럼
푸르게 소통하고 신나게 어울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180621)
산과 산이 맞닿아
데칼코마니를 찍어낸 계곡
졸졸졸- 청아한 물소리
재즐재즐- 산새 소리 정겹다
철부지들, 아랫배가 볼록하니
까르르- 계곡 물에서 즐겁게 놀고
훔쳐보는 청설모 한 쌍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를 넘나든다
나뭇가지 사이에선
풀벌레가 푸른 여름을 노래하고
마주한 산들이 온몸을 던져
기다랗게 산 그림자를 만든다
이에 질세라, 한여름 뙤약볕도
산과 숲과 물을 뜨겁게 달구는
사람과 숲과 계곡이 하나 된
여름 계곡, 자연은 살아있다.
- 여름 계곡 -
* 승학산 : 부산 사하구 소재, 억새 숲이 유명한 해발 496고지
* 소소리바람 : 이른 봄에 살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차고 매서운 바람
* 하늬바람 : 서쪽에서 부는 바람, 서풍(西風)
* 자드락 : 나지막한 산기슭의 경사진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