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시대'를 읽고
「홍상화」 작가의 작품을 얘기할 때
그는 작품 속에서의 쾌감을 텍스트성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텍스트성을 엄격한 규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그것은 '열려있는 작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열려있기에 언제나 드나들 수 있고, 부분만을 떼 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삽화나 대화 한 줄의 음미로도 족한 것이다.
독자가 멋대로 읽을 수 있으며, 그 때문에 거기엔 오독(誤讀)의 자유가 초원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일단 연재가 끝나면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텍스트성에서 작품성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작품성이란 무엇인가 ?
'시학'의 저자가 발견한 법칙인 '처음 중간 끝의 관계', 곧 완결성의 의미로 이 사정이 요약된다.
'거품시대'의 연재가 끝난 마당이라면 응당 이것은 이제 작품성의 위치로 옮겨진 형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품을 걷어내고 그 밑의 맑은 물줄기의 흐름을 알아보는 일이 불가피해진 셈이다.
이 소설은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서 1990년 겨울까지를 배경으로
기업체의 장(長)들이 벌이는 욕망의 허상과 실상을 다루고 있다.
고도성장에 따른 밀고와 모함, 정경유착 등의 비정상적인 수단에 의해 겨우 이루어 졌다는 것,
그런 비리가 어떻게 그 속의 인간들을 파멸시켜 왔는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보면
의외로 이 소설의 주제는 무겁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함께 파멸된다는 이 논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런 해답을 일목요연하게 쥐어준다.
정경유착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구석에서 왔고, 나아가 자본제 생산양식 그 자체에서 왔다.
기업체 사장인 '이진범', '진성구', '백인홍' 등이 38세에서 40세에 이르는 과정에서
위의 사실을 알게 모르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진범'이 미국으로 도망쳐야 했고, '진성구'가 영화제작으로 도피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거품을 걷어낸 이 작품 하단부의 흐름에서 작가 자신의 몫은 무엇인가.
남아(男兒) 일생 20년이 훈련기간이라면, 또 20년은 경제자립 기간이고,
그 다음 20년은 자기만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인생 3등분이 작가의 목소리라고 이해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그것은 남성우월주의 사상이 근대화의 주력이었다는 주장이야말로
작가 '홍상화'씨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거품시대'의 저류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울리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