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찻잔 사이 / 청송 권규학
비가 내립니다
가을이 속 깊이 젖어드는 비
포도(鋪道)엔 왕관 모양 포말
지붕 위엔 젓가락 가락가락
창문턱엔 또그르르 옥구슬
토닥이는 빗소리를 듣노라면
왠지 기분마저 나지막이 가라앉습니다
젊은 시절의 비는 낭만이었습니다
우산 속 마주 잡은 두 손에 전달되는 온기
당신의 체온은 사랑이었고
빗소리는 다듬이방망이 가슴 뛰는 소리였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 우수(憂愁)에 젖었습니다
험난한 인생길을 적시는 한기(寒氣)
살아온 삶은 회한(悔恨)이었고
빗소리는 솥뚜껑에 놀란 자라 가슴이었습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할 때
두 눈을 질끈 감았듯이
삶의 고뇌를 떨치지 못할 때
도리도리 고개를 휘저었듯이
괜스레 비를 맞고 싶을 땐
무작정 집을 나와 들길을 걷습니다
오늘은 내리는 비를 보지 않겠습니다
토닥이는 빗소리도 듣지 않으렵니다
빗줄기에 투영된 삶의 편견
빗소리에 젖어드는 아픈 기억들
보지도 듣지도 않은 채
그저 주어진 현실의 몫에 집중하렵니다
조금씩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창문틀의 빗소리도 강해집니다
살아온 삶의 무게인 양
암담한 현실의 초상인 양
세차게 대지를 두드리는 비
문득 차 한 잔이 간절해집니다
발코니 탁자 위에 찻잔을 놓고
너 한 잔 나 한 잔 차를 나눕니다
있는 듯 없는 듯 보이지 않는 너
그대 모습 찻잔 속에 있고
나의 모습 그대 품 속을 파고듭니다
오늘은 왠지 비에 젖어들 것만 같습니다
당신 그리움의 빗줄기 속에.(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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