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날엔(2) / 청송 권규학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던 산 그림자
앞마당을 넘어갈 즈음엔
술비* 내리는 추녀 끝에 앉아
소꿉놀이하던 내 유년의 동무들이…,
일비* 내리는 아침엔
해맑은 이슬방울에 볼을 비비던
파릇파릇
고향 집 뒤뜰의 연둣빛 새싹들이…,
잠비* 내리던 날엔
어머니, 정구지 찌짐 부쳐내시고
크으-! 탁배기 한 잔에 어우러진
내 아버지의 취성(醉聲)이 들려옵니다
오늘은 떡비*가 내립니다
가랑비 사선(斜線)을 긋는 이런 날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스크린으로 떠오릅니다.(170927)
* 술비 : '겨울비'를 일컫는 말
'농한기에 술 마시며 놀기 좋다'하여 붙여진 말
* 일비 : '봄비'를 일컫는 말
'봄에는 일이 많아 비가 내려도 일을 한다'는 의미
* 잠비 : '여름비'를 일컫는 말
'여름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낮잠을 잔다'하여 붙여진 말
* 떡비 : '가을비'를 일컫는 말
'가을걷이가 끝나 비가 오면 여유롭게 쉬면서 떡을 해 먹는다'하여 붙여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