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선의 '고양이에게 말 걸기'를 읽고
공직생활을 은퇴하고 귀촌한 이곳 청도, 어느새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자연(숲)과 더불어 글을 쓰며 살아가노라니 풀과 나무와 동물들과 특별히 친해지는 계기가 된 듯하다.
언제부턴가 전원 뜨락을 가득 채운 길고양이들의 난장(亂場)을 지켜보며,
‘길고양이들이 자연과 인간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뭘까’를 생각하던 중 왠지 맞춤인 듯한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이 책…, 도서의 검색과 더불어 구매를 서둘렀다.
내가 사는 청도고을은 대형서점이 없는 시골인지라 인터넷 검색이나 도시에 사는 지인들을 통해
구할 수밖에 없다.
‘고양이에게 말 걸기’…!
이 책은 얼핏 지천(至賤)에 난립한 고양이들을 돌보고 보호하려는 내용에 장편일 것이란 선입견과는 달리
비교적 작은 크기에 여덟 편의 작품을 모아 엮은 단편이었고, 백종선이란 이름의 작가 역시 남성일 것으로
추측했으나 1990년에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샘터의 달빛’이란 작품으로 당선된 강원도 춘천 태생의
여성작가라는 것도 의외였다.
첫 장 첫 줄의 ‘상상은 마음의 공기, 마음의 놀이다’라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꽂혔다.
늘 마음에 담고 있던 의미의 문장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가까워진 듯한…, 뭔지 모를 친밀감으로
다가섰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고양이에게 말 걸기’를 비롯하여 ‘기이한 예감’, ‘낯익은, 목소리’, ‘내 사랑 굼벵이’, ‘두 번째 서랍’,
‘바람의 발자국, B’, ‘짐승의 시간을 마주한 남자’, ‘특별한 날의 해프닝’…, 등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으며,
그중 첫 번째 작품인 ‘고양이에게 말 걸기’를 읽고 느낀 소감을 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민호’의 어머니가 본 3인칭 관찰자적 시점의 작품이다.
주인공 ‘민호’는 한 때 대기업 산업디자이너로서 화이트 칼라였지만 전공과 성격, 대인공포증 등
아부성 행동에 적응하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 3년째 백수생활을 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인 그는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그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면 누구나가 겪는
‘틱 장애’와 극심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부모에게 기댈 수도 없어 얼마간 모아둔 적금을 깨어 생활하며, ‘청년 일자리’, ‘쿠팡 택배’ 등
백수를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지만 여의치 않자 결국 ‘모바일 게임’에 빠져든다.
어느 날…, 밥에 섞인 머리카락에 짜증을 내며 투정을 부리는 ‘민호’…,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
-외국계 유통회사 구매본부장-는 어머니 편에 서서 백수인 ‘아들(민호)’의 현실을 탓하며 꾸짖는다.
문득 아버지에게서 꼰대(?)의 느낌을 받고 스트레스를 풀고자 근처 어린이놀이터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가끔 보았던 길고양이 ‘참깨’-참깨밭에서 만나서 ‘참깨’로 이름 지은-를 만난다.
고양이의 눈에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비쳐 슬펐지만 길고양이 ‘참깨’의 재롱에 금방 기분이 좋아져
그저 즐거워하는 ‘민호’…, 돌아오는 길에 원룸 사장의 아들인 ‘K’를 찾게 되고 그로부터
‘30대 싱글 남녀카페’를 소개받아 가입한 뒤 곧바로 미팅에 응한다.
미팅에 나온 여자는 단아하면서 지적인 타입의 ‘학원 논술강사’, 청재킷과 시폰치마 차림의 ‘북 카페 사장’,
늘씬한 각선미의 ‘미장원 실장’의 세 부류였다.
첫눈에도 ‘학원 논술강사’는 영리해 보였으나 답답한 느낌이 들었고, ‘미장원 실장’에게 마음이 갔으나
이미 ‘K’와 교감이 있는 듯 둘이 먼저 자리를 떠난 후 ‘논술강사’의 제의로 청재킷과 셋이서 함께
호프집으로 2차를 가게 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청재킷’의 육탄공세를 받는다.
그렇게 시작된 이상한 연애(?)-욕망을 채우고 나서 마음이 찾아 든-가 시작되었고,
섹스 도중 ‘청재킷’의 아랫배에 남은 제왕절개 수술 자국(지네 모양 흉터)을 발견한다.
모텔을 나온 ’민호‘는 ‘고소해’라는 그녀의 이름과 중2의 딸이 있는 유부녀임을 확인-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말함-하게 되지만, 반찬과 음식을 꾸준히 가져다주며 구애하는 ‘고소해’의 유혹에
관계를 유지할까 말까로 갈등하던 중 모르는 남자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전화를 받는다.
직감으로 ‘고소해’의 남편임을 알게 된 ‘민호’는 그날 이후 직장에도 나가지 않고 여자에 대한 불신과 함께
은둔자로 전락하고 만다.
은둔생활을 하던 ‘민호’가 당첨된 2만 원짜리 즉석복권을 들고 동물백화점에서 고양이먹이인 참다랑어와
놀이기구, 진열대에 전시된 여러 권의 시집 중 한 권을 산다.
‘고양이에게 말 걸기-고소해’…!
특이한 제목과 이름임을 느끼면서도 ‘고소해’가 ‘청재킷’과 동일인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공원에 가서
‘참깨’를 찾았지만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가을이 올 때쯤 공원에 고양이 잠자리와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던 중 ‘참깨’를 만난다.
실직 후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 ‘민호’는 재롱을 떠는 ‘참깨’에게서 위안과 친밀감을 느껴 먹이를 주고
놀이기구를 이용하여 즐겁게 놀아준다.
때마침 이력서를 넣은 (주)도도식품 관리팀장 면접 메시지가 뜨자마자 자칭 ‘참깨’의 전 주인임을 자처하는
여자가 ‘토리’라는 이름을 부르며 ‘참깨’를 안아 올린다.
‘민호’는 ‘참깨’를 안은 여자에게 ‘길고양이는 주인이 없으며, 알게 된 기간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며,
자신이 ‘참깨’와 더 친하다는 걸 항변하지만 결국 여자에게 ‘참깨’의 소유권을 빼앗긴다.
‘참깨’를 안고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참깨’가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민호’…,
문득 떠오른 ‘고양이에게 말 걸기-고소해’의 시집을 펼친다.
『십이지에도 들지 못한 야옹이-아웃사이더…, 잠이 많아서 신전 세배를 놓친 게으름뱅이…, 느린 소가 방심하는 사이 소 등에 올라탄 쥐보다도 못한 야옹이…, 그래서 복수혈전으로 쥐를 잡는다고 광분하다가 노인들의 길 안내로 전전하며 반려묘로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엔 버려져 길고양이가 되었다는….』
『초록별(지구)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으나 끝내 고양이와 똑같이 아웃사이더가 된 자신의 운명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먹이를 주고 보살폈지만 끝내 광활한 우주의 한낱 먼지에 불과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는…, 그래도 ‘남을 해하지 말고 꼭 살아남으라’는.』
시를 음미하는데 ‘복통으로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간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혼미한 상태로 귀가를 서두른다. ‘고양이에게 말 걸기-고소해’ 시집은 벤치에 그대로 둔 채.
집으로 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민호’, 사철나무 숲 가장자리로 하나 둘 모여드는
길고양이들의 모습들…. 이렇게 ‘고양이에게 말 걸기’가 마무리되었다.
21페이지 정도는 될까. 아무리 단편이라지만 짧아도 너무 짧다.
하지만, 그 짧은 작품 속에 길고도 긴…, 몇날며칠을 풀어놓아도 못 다 할 말들과 현실을 꼬집는
말 없는 말들이 질펀하게 녹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주인공 ‘민호’의 삶에서 오늘을 사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갈등과 고뇌의 모습이 보였고,
‘고소해’와 그녀의 시집 ‘고양이에게 말 걸기’에서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함께 성공이란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백수인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 부모 된 입장으로 동질감을 느낄 수가 있었으며,
아버지의 핀잔에 짜증과 투정을 부리면서도 늙은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에 스스로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민호’에게서 나이와 입장이 비슷한 아들이 있는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음에 순간 울컥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겪는 공통적인 고민과 갈등의 모습이리라.
미팅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여자들-‘학원 논술강사’, ‘북카페 사장’, ‘미장원 실장’-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숱하게 많은 인간 군상(群像)들 중에서 굳이 왜 이 세 부류만을 등장시켰을까?
여러 부류의 캐릭터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이들 셋만으로도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기엔
충분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민호’가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으로 길고양이 ‘참깨’가 등장하는데, 인간이 하지 못할 일을 가끔은 동물,
특히 애완동물(반려동물)이 대신할 수도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아버지의 응급실행 연락을 받고 ‘고소해’의 시집을 벤치에 둔 채 귀가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는
‘민호’의 행동과 공원의 사철나무 숲으로 모여드는 길고양이들의 실루엣은 놓쳐버린 삶에 대한 ‘미련’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배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고양이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동물인 고양이와 친해지려는 단순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으나
‘혼탁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단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긴 질문과 함께 깊은 숙제를 남긴다.
요즘 길고양이의 개체수가 엄청나다. 전원 주변을 활보하는 숫자만 해도 스무 마리를 웃돈다.
폐건물과 창고, 담장 밑과 빈 박스, 하물며 인간의 삶터 곳곳에 이르기까지 길고양이들의 영역은 한계가 없다.
정말 길고양이들이라면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만, 창고를 지어 그 안에서 사료를 주며 고양이를 키운다.
가축처럼 묶어놓거나 우리에 가둬 놓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을 열어 방목(放牧)을 하니 이웃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그러다가 이웃 간에 언쟁의 명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통제되지 않은 짝짓기로
개체 수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면야 고양이의 재롱을 볼 때마다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고양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신경이 쓰이고, 집구석구석을 헤집고 들어와서
살림살이를 어지럽힌다거나 갑자기 후다닥 도망을 칠 때마다 심장을 쓸어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사람-어린아이-에게 해코지하는 고양이들도 있다.
이젠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키우는 시대는 지났다. 한두 마리 정도 집안에서 반려묘로 키운다면 또 모를까,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무리를 집단 사육하여 이웃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미안함이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동물을 사랑한다는 이유로는 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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