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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서 평

기형도 고찰(考察)

    
    '기형도 고찰(考察)'
    
    
    기형도 !
    어쩌면 1960년에 태어나 1989년, 만 29세의 나이로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던 
    이 시인에 대한 삶의 단편이 슬픈 전설처럼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이전의 어떤 시인도 표현하지 못한 
    암울하고 독창적인 시어(詩語)로 현실을 그려내 90년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발간된 지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동네서점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다우면서도 절망적인 세계관이 투영된 시어(詩語)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에 맞아 우리의 기억 속에 뭔가 특별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난 그의 시집을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얼마 전에 접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시집을 산 때는 유고시집이 나온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꺼내 읽는데 1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
    기형도 시인은 죽기 직전까지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사람으로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응모, '안개'가 당선되었을 때 그의 직업은 중앙일보 수습기자였다. 
    신문사 기자와 시(詩).      
    한편으로는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작가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신년을 화려하게 열며 등단했던 것만큼 좋은 작품들을 써 주는 것이리라.
    신문에서 뿜어내는 그의 날카로운 필력(筆力)을 접하면 모든 이에게 그렇듯이 
    내게 그는 시인보다는 기자로 더 각인되었고, 시인으로서의 생명력에 회의(懷疑)를 갖게 했었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달리 그 후 그는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했고, 
    그의 작품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 감수성에 기반을 두고 절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늘 그것이 그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불안감에 젖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니, 이 놈이 시(詩)를 유서쯤으로 아나 ?'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 아래인 그를 두고 나는 가끔 그렇게 투덜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서점의 직원으로부터 '기형도가 죽었단다.  
    그가 정말 죽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섬뜩함.       
    그가 남긴 유고시집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치 그의 시체를 끌고 집에 들어오는 듯한 
    무거운 느낌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순간이나마 문학청년이기를 고대했던 나를 진지하게 만들었던 그의 죽음에 대한 충격, 
    공식적인 그의 사인은 뇌졸증이었지만 
    스스로 죽음의 늪으로 기어들어간 듯한 그의 삶의 마지막 장면을 과장없이 받아들이는데 10년이 흘렀고, 
    어느 날 난 전혀 모르는 다른 시인의 시집을 꺼내듯, 그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의 시집은 이제 막 인쇄되어 나온 새 책처럼 빳빳했다.
    마치 절망의 끝이 구원인 것처럼 절망을 향해 치달았던 그의 치기(稚氣)어린 감수성처럼 
    유고시집에 실려있는 시들 대부분은 눈으로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 듯 했다.
    시집을 끝까지 다 읽었고 읽고 난 후 푸념처럼 뇌까렸다.
    '짜식 사내녀석이 이렇게 감수성이 예민해서야...', 
    혹시 독자들이 나에게 망자를 두고 무슨 건방진 소리냐고 몰매를 던질지도 모르겠지만 
    망자(亡者)가 산 사람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다면 그는 나보다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바뀔 정도로 차이가 나고, 
    또 그의 감수성은 사내의 것이라고 하기엔 꽃잎처럼 너무나 하늘거렸고, 
    나의 푸념은 부하들의 잘못에 큰 소리 한 번 치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서점에 달려가 그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을 샀다.  
    그리고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배를 채우듯 그의 글을 독파했다.
    글이란..., 그것도 죽은 자가 남겨놓은 글이란 원래 이상야릇한 느낌을 갖게하는 법이다.
    우린 흔히 이미 그가 죽고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남겨놓은 행적에 대해 저항하고 대항하는 전투력을 상실한다.
    망자를 향해 저항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 또 있겠는가 ?
    그래서 망자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한없이 관대해지는 면이 있다.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이 살았을 때 그와 마주친다면 
    목숨을 걸고 그를 죽일 듯이 덤벼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사람들조차 그가 막상 죽고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누군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역겨울 정도로 과장하고 나섰을 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는 것은 
    그의 업적을 인정하거나 찬양할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이미 망자이기 때문에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형도 !
    그의 산문집을 읽으며 나는 글, 종이에 찍혀있는 활자의 솔직함에 대해 진저리를 쳤다.  
    그것이 상품성이 있던 없던 간에 종이에 찍혀 활자화된 글은 있는 그대로 후세에게 전해지고 
    그 활자들의 나열에 대해서 망자는 수정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절망의 끝을 구원으로 알고 향해 가는 그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감성에 속하는 것이었고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을 뿐이지 수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詩)란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시는 시인이 보는 이 세상에 대한 그림과 같은 것이다.
    아틀랜타 봉화대를 두고서 현대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꼴불견 중에 꼴불견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시가 쓰여졌을 때, 
    시란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양극단 사이에서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형도의 산문집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그의 어설픈 지식과 감성은 
    그의 삶의 깊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면서 그에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망자가 남긴 시는 저항을 하게 할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산문(소설이나 잡문)에 냉혹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은 
    시보다는 산문이 이성적인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난 기형도 시인을 사랑한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느낀 사람에게 구원은 절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기형도는 절망이 구원이라는 것을 노래하던 유일한 시인(나에게 만큼은)으로 기억되어 있다.         
    이미 망자가 된 그를 모욕할 이유가 내겐 없다. 
    하지만 그의 산문집은 지적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어 읽기가 불편하다.
    산문은 시와는 다른 그 어떤 것이다.         
    이성에 바탕을 두고서만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줄 수 있는 그 무엇...? 
    앞에서도 말했지만 활자의 위력은 대단하다.       
    어떤 이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기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던 글을 모두 태워 버릴 것을 요구했다.      
    그가 현명했다는 것을 기형도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금 느낀다.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그는 전라도 순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안개와 병든 지성의 도시, 부폐하고 끈끈한 항구, 소금의 도시.
    순천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5킬로미터, 전망좋은 여천 바다가 15킬로미터.
    손쉽게 순천바다는 포기하였다.       
    도시 가득 소금기 섞인 해풍이 군림하고 있다.     순천은 나에게 음습한 도시다. 
    누구든지 몇 달만 이곳에 산다면 쉽게 권태와 체념에 길들여진 욕망을 체질 속에 받아들일 것이다.     
    불만으로 가득 차 보이는 눈동자들...,』
    기형도가 광주를 떠나 순천에 4시간 남짓 머무르는 동안 순천에 대해 기록한 것 중의 일부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지식은 올바른가 ?        아니다.       
    대부분 그는 잘못된 인식에서 순천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순천이 항구도시라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순천은 항구도시가 아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순천에는 높은 산이 없다.       그래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 정도이다.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곳.      
    순천은 대한민국에서 해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살기 좋은 곳 중에 하나다.  
    순천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광양과 여수가 있다.
    여수가 항구도시다.      
    순천의 말씨와 광양과 여수 말씨는 같은 전라도인데도 무척 다르다.       
    순천 사람들은 광양사람들의 그 거친 말투를 싫어한다.
    광양여자는 생활력이 강하긴 하지만 너무 거칠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순천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손꼽힐 만큼 순한 사람들에 속한다.
    순천은 음습한 도시가 아니라 투명한 도시 중에 아마도 제일로 꼽힐 그런 도시이다. 
    순천에는 소금기가 없다.     
    큰 희망이 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도시개발로 벼락부자들이 들끓는 그런 도시는 아니다.
    권태와 체념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아니다.       
    순천에 사는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도시에 살면서도 권태와 체념을 모르고 사는 몇 안 되는 도시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순천 사람들, 그들은 떠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다.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어떤 절망적 상황이 도달해도 그곳을 떠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주 조용한 곳이다.
    학생들이 우글거리고 서울에만 있다는 상표의 가게들이 즐비한 소비도시.
    난 그들의 그 조용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중의 하나일 뿐이다.
    너무 순천을 칭찬하고 좋은 말만해서 내가 순천사람인 줄 알면 그건 오산이다.
    난 분명 오리지날 경상도 촌놈이다.       
    다만 친한 친구가 살고있는 곳이라서 순천에 서너 번 방문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기억 속에는 순천이란 도시의 긍정적인 면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기형도는 그 도시를 음습한 도시라고 지칭했다.
    무릎까지 바지를 걷고 다니는 사내들의 느릿한 보행, 가까이 가도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소리를 내지않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을 두고 기형도는 쉽사리 경계를 풀지않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잠시 순천을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순천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기 몸의 일부분처럼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 순천 사람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가벼움보다는 무거움을, 넓이보다는 깊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순천사람들이다.
    기형도 !       
    그가 순천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서 그의 가벼움을 본다.    
    확인한다.
    그의 웃는 모습은 멋지다.       
    이쁜 것이 아니라 멋지다.
    그는 시인처럼 웃고 있다.     
    그의 산문집은 있는 그대로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드러낸 것이다.       
    기형도 !     
    난 그를 사랑한다.     
    바보처럼, 그는 그를 변명하지 못한다.       
    망자가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절대로 변명하려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잘못된 느낌 그대로를 활자로 남겨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중의 하나이다.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이 지나치게 가볍게, 
    지나치게 무겁게 삶을 이해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망과 희망 사이의 그 무엇이라는 
    그 무엇에 대해 정의내리는 작업이 의미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모든 의미를 떠나서 우린 29살에 삶을 마감한 이 시인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30대의 사람들은 20대를 정리하기 위해서..., 
    20대는 자신과 같은 20대의 끝을 죽음으로 마감한 시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물어 볼 필요가 한 번쯤은 있을 것이므로...,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삶이란 선택하는 자의 또 다른 선택일 뿐임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어쨌든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수년이 지났지만 1999년도였던가...?
    그의 10주기를 기념해 미발표 시와 소설을 묶은 「기형도 전집」이 발간되어 그의 흔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지만, 
    살아있다면 지금쯤 불혹(不惑)을 넘겼을 그 시인은 지금에와서 어떤 시를 쓰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아쉽고도 들뜬 마음과 그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담아 부족하나마 이 글을 남긴다.
    시인 기형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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