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太白山脈)'을 읽고
남·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그려낸 소설 '태백산맥'은 「한국문학」에 연재된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로써 전라남도 벌교를 중심으로 한 빨치산 투쟁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군상(人間群像)을 그린 작품으로써 출간되자마자 각계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작가의 구속이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킨 화제의 대작(大作)이다.
지금껏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었으면서도 나름대로 좋은 작품을 쉽게 찾지 못하다가
'태백산맥'에 대한 명성(?)을 전해들은 이후 반드시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10권이라는 분량의 장편인데다가 바쁜 일상업무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영화를 먼저 접한 연후에서야 비로소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매스컴은 물론 범인(凡人)들의 입과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엇보다 보람을 느꼈던 것은 빨간색이라고 하면 무조건 경시하고 회피해왔던 나의 의식구조에
새로운 사고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과 그 동안 내가 가졌던 우리의 과거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데 있다.
특히 대하 역사소설인 만큼 줄거리 요약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어느 정도 해소된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이념을 다룬 이 책을 대함에 있어
약간의 거리감이 있기도 했으나 지난 '한국전쟁'의 상흔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 작품은 크게 나누어 제1부 '한(恨)의 모닥불'과 제2부 '민중의 불꽃',
그리고 제3부 '분단과 전쟁', 제4부 '전쟁과 분단'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우선 제1부 '한(恨)의 모닥불'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우리의 분단된 삶을 통찰함에 있어서
1948. 10. 19일의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이끌어 갈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방 후 좌익사상으로 무장되어 부패하고 무능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그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과의 대결을 보여준다.
주인공 김범우는 지주의 아들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완전히 좌익화된 염상진과는 대조적으로 민족주의를 앞세우며 그 어떤 이념도 따르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악독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양조장 집의 큰아들 정하섭도 일본유학 당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염상진, 김범우와 통하는 사상의 끈을 맺게된다.
또한 염상진처럼 사회적으로 출신이 빈약한 계층,
즉 대표적으로 하대치와 같은 열성을 지닌 사람들도 등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라고 한 늙은 머슴의
한마디로 집약될 수 있겠다.
제2부'민중의 불꽃'에서는 여순사건과 6.25 한국전쟁 사이에 끼어 있는
정치·사회적 '민족분단 가속기', '민중 세력 형성기', '전쟁의 잉태'라고 할 수 있으며,
분단사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로써 빨치산 행동을 하게되는 좌익 사상가들과
그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들, 그리고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악독한 지주들과 착취당하는 피지배 계층, 그리고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 등을 다루고 있다.
제3부 '분단과 전쟁'에서는 시대적 배경을 1949. 10∼1950. 11월까지의1년 동안을 다루고 있다.
농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농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어지고 자기이익을 위한 지주들의 음모가
현실화되는 가운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표출되고,
계엄해제와 함께 계엄군이 벌교를 떠난다.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계속되고 남한사회에 부패지수가 더욱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초기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한다.
김구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적인 통일을 염원하기에는 틀림을 깨닫게 되는 김범우와
사회주의 사상에 투철한 염상진, 그리고 반공회 회장이되어 그 뒤를 쫓고 있는 그의 동생 염상구 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또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범우의 형(김범준)이 빨치산 사령관이 되어 집을 방문하는 것도
사건의 큰 줄기중의 하나라 하겠다.
제4부 '전쟁과 분단'은 한국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 1950. 11 ∼1953. 10월
전쟁이 끝날 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뒤로 쫓기는 사회주의자들이 하나·둘 희생되고,
거제 포로 수용소에 수용된 김범우는 남쪽에서의 '역사투쟁'을 위해 위장전향으로 석방된다.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빨치산 토벌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대부분의 전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김범우의 형이자 독립운동가 출신 빨치산 사령관인 김범준도 죽고, 염상진 역시 자폭을 하지만,
늘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그의 부하 하대치가 새로운 투쟁을 위한 준비를 계속함으로써
염상진의 죽음이 빨치산 활동의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라는 점을 암시하며 대단원의 종지부를 찍는다.
이 소설 '태백산맥(太白山脈)'이 다루고 있는 시대를 흔히들
'민족사의 매몰시대', 또는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곧 그 시대가 그만큼 치열했고 격랑이 심했으며,
분단사 속에서 또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했음을 의미한다.
그 시대의 진실과 참된 모습을 현대인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작가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왜곡된 시선이 아닌 역사의 먼 뒤안길에서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작가 「조정래」로 하여금 이러한 대작을 쓰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설은 단순히 상상력의 산물일 수만은 없으며,
엄연한 역사 사실 앞에서 엄연히 사실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 점에서 소설 '태백산맥'이 더 위대해 보이는 게 아닌지...,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소설이라는 장르도 그 시대의 상황을 담고 있는 생명력과 같은, '시대를 얼마나 다르게 표현하는가'하는
사건접근의 독창성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 「소설이 갖추어야 할 생명력」과 관련하여 이 작품을 평가해 보고자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太白山脈)'은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결현장을 그려내면서도
결코 그것을 관념적인 논리로 이끌어가지 않고 작품 속 등장인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이 이념의 한 복판에까지 뛰어들게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작품 속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분단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리들 앞에 떠오르는 두 개의 세계,
즉 '한(恨)의 세계'와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뛰어난 솜씨로 결합시키면서
그것을 통하여 뜨거운 감동의 공간을 창조해 내고 있다.
그 감동의 공간이 '태백산맥(太白山脈)'이라는 작품의 방대함을 말하기보다는
그 구체성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한다. 구체성이라는 것은 삶과 역사에 대한 직접성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의지의 표출이며 희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관념이 아니라 생명의 분비물이다.
생명의 분비물일 때만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기동하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받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그 시대의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생명력이 중요한 것이다.
여순 반란사건이라는 특수한 시간을 시발점으로 한국 근대사의 총체적 양상과
복합적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면서 작가는 각계각층의 인물 60여명을 등장시켜
개인적 견해와 그들의 사상을 소상하게 밝혀 그 시대의 전형적 인물로서
그들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을 정밀하게 점검하였다.
그러면서 어느 한 쪽의 사상이나 관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엄정하게 유지하여 사상이나 인물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였다.
이 점이 바로 소설 '태백산맥(太白山脈)'이 지닌 생명력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 갖추어야 할 사건 접근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소설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여순 반란사건의 진상은 곧 '소작쟁의'로 표현할 수 있다.
해방 전후와 국토분단, 그리고 6.25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정치적 음모나
이념적 갈등의 시각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해방 이전 식민지 시대부터 땅을 둘러싼 지주와
소작인들의 갈등이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형상화시켜 보여준다.
해방 직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토지개혁을 지연시키고 친일파를 재기용하는 등,
반 민족적·반 민중적 행위를 거듭한 것이 민심의 흐름을 좌익의 주장에 동조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한다.
지주인 최씨, 김씨, 그리고 일본인 중도와 그 밑의 모든 소작인과의 대결과 갈등이야말로
여순 반란사건의 본질이라고 파악한 일은 우리 문학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지리산'의「하준규」나 '영웅시대'의 「이동영」이 지식인 출신이자 지주 계층 출신이었다면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주인공「염상진」은 상놈 출신이고 소작인 출신이다.
우리 문학이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해방 후 지금까지의 기간, 즉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그만큼 우리가 그 시대를 표현하는 시기에는 결국엔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였고
지배자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알맞게 각색하여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우리 문학의 사건 접근방법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전반적인 흐름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제시하면서도
결코 이념에만 치우치지 않았고, 또 일련의 사건전개를 정치적 음모나 이념적 갈등의 시각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지주와 소작인들의 '소작쟁의'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건접근의 측면에서도 별다른 걸림돌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10권 중 7권은 '군더더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군더더기'는 당대 민중의 생활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전적(辭典的) 의미의 진정한 '군더더기'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민족주의를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움'이거나,
'세계적 조류에 역행하는 쇼비니즘'이라고 말하던 대다수 지식인들의 외침들에
다시 한번 재고의 기회를 부여해야 할 것이며,
일본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내세우며 군사대국이 되려고 하는 이 시점에서
민족주의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통일 및 세계평화까지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아울러 끊어진 태백산맥의 허리를 이을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통일에 대한 사고(思考)를
다시 한번 재고해 본다는 의미에서 이 책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일독(一讀)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