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를 읽고
고교시절 헤밍웨이의 작품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밤새워가며 읽다보면 날이 밝아오고 피곤한 몸으로 등교를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가끔씩 뇌리를 스친다.
한 때는 문학의 길을 택할까 하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군(軍)이란 특수조직을 경험하고, 지금은 국민의 공복으로 살아가고 있다.
헤밍웨이의 초기 단편인 '인디언 부락'을 비롯하여 '무기여 잘 있거라', '강건너 숲속으로',
'노인과 바다' 등 그의 작품은 닥치는 대로 읽었었다.
헤밍웨이의 작품보다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작가적 세계와 생애에 대한 고찰도 종종 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대표작인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는 글 말미에 소개하고 그의 생에 대해 조명하고
작품을 읽는 것도 독서를 잘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생각된다.
'영원한 허무주의자 헤밍웨이'- 미국 문학사에서 헤밍웨이 또래의 20세 전후에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세대를 보통 '로스트제네레이션'이라고 말한다.
'로스트제네레이션'이란 자기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전 벌써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정신적·육체적으로 격심한 타격과 부상을 입었던 미국 청소년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처럼 '로스트제네레이션'의 기수격인 헤밍웨이의 작품은
대부분 허무주의적 죽음에 대한 소재가 눈에 자주 보인다.
그의 첫 사랑-밀라노 육군병원에서 좌절된 사랑으로 상처를 가진
그의 문학작품의 주제로 그를 괴롭혔던 것 같다.
이젠 본론적으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에 이르러 허무에서 완전히 긍정으로 바뀐다.
조던은 전쟁과 단독평화를 맺는 일이 없이 전쟁에 새로운 의의를 인정하고는
전쟁에 대하여 적극적인 의4욕을 가졌다.
프레드릭은 카로레토의 혼란에서 군대를 떠나지만 조던은 그와 같은 혼란에서도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려 한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공화국을 위하여 싸우리라 결심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끝내 적탄에 맞고 쓰러지지만 그는 도망을 단념하고 죽음을 택한다.
죽음 속에 삶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파멸적 니힐리즘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에는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장래를 향한 가치정립으로서의 방향이 확립되어 있다.
이처럼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는 니힐리즘을 완전히 불식해 버린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