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를 읽고
한국사회가 해방 이후부터 오늘까지 겪어온 가장 큰 시련의 하나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지켜온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가 급격하게 밀어닥친 이질적인 새로운 가치들과 충돌함으로써 빚어진
갈등과 혼란의 시련이라 할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이 땅에는 서구, 특히 미국문화가 밀려들어옴으로써
이를 무의식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사회는 전통적 가치관의 근본적 동요라는
최초의 충격을 맞게 되었으며,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것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 이후 부패한 이승만 독재정권과 4.19 학생의거 뒤의 5.16 군사혁명에 의한 군사독재는
한국사회의 기존 도덕과 질서를 파괴시키고 전혀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도입시켰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신구가치의 충돌과 질서의 혼란으로 오늘날까지
진통과 시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그 시대의 상황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고, 특히 문학장르 중에서도 대표적인 희곡을 읽음으로써
문학관이나 세계관을 엿보고 싶은 생각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극작가 「이용찬」씨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중학시절을 보냈고,
해방 후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사회적 혼란의 시대를 예민하게 살아왔던 증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해방으로부터 6.25 4.19 5.16에 이르는 격변기, 그리고 암담했던 유신체제를 겪기까지
한국사회의 모든 크나큰 변혁과 혼란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동시에 그가 성장하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가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점차 와해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이용찬」은 50년대 후반에 극계에 데뷔했다.
그 당시 창작극 계는 유치진, 오영진 등, 불과 극소수의 선배 작가들이
겨우 창작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각을 보여 줄 희곡은
오직 새로 등장하는 극작가에게서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용찬」의 데뷔는 바로 그러한 새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극계의 촉망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중학시절에 이미 주위로부터 문재(文才)를 인정받았고,
그때부터 장차 작가가 되리라는 마음을 품고 작가수업을 시작하였다.
1957년 '가족'이 국립극장 장막희곡 공모에 당선됨으로써 연극계에 정식으로 첫 발을 내디딘 그는
1958년 단막 '모자', 1959년 장막 '기로', 1960년 장막 '삼중인격', '피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와
단막 '부부', 1962년에 장막 '젊음의 찬가', '고독은 외롭지 않은 것'과 단막 '표리', 1963년에
장막 '푸른 명백'에 이르기까지 장막 6편, 단막 3편을 발표하였고, 간간히 라디오와 TV극을 쓰기도 했다.
1960년에 발표된 그의 희곡 '피는 밤에도 자지 않는다'는 그의 두 번째 장막극으로
1960년 4.19 이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학생혁명과 그 이후 학생들이 흘린 피를
타락한 정상배들이 파렴치하게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는 한편, 그같은 한 정상배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새로 돋아나는 건강한 정신과 삶을 찬양하고 있다.
타락한 선거풍경과 한 가정 장면을 교대로 전개시켜간 극의 구성은
기성인들의 썩은 세상과 젊은이들의 새 세상을 대비시켜 준다.
이것은 극 마지막 부분에 새로운 생명의 신생아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늙고 병든 구시대 인물의 죽음으로 훌륭히 상징화하고 있다.
「이용찬」의 정치적 관심과 그의 견해가 잘 반영된 작품이다.
무책임하고 타락한 가장이었던 최종수가 늙고 병들면 결국 다시 가족을 찾는다는
우리의 옛말을 입증하듯 10년 간 내버렸던 아내와 자식들을 찾아오는데서 비롯된다.
최종수는 전처와 이혼하고 윤씨와 다시 결혼, 경호·민호·정애 삼남매를 둔 가장이 되었지만
다시 그들을 내버리고 빠아마담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동안 경호는 해장국 집을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고, 민호는 4.19 데모 중에 부상하여
다리를 절단 당했지만 마음과 정신은 매우 건강하고 쾌활한 젊은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이런 가정에 아버지 최종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지난 과거를 뉘우치고 자식들의 용서를 구하는 한편, 그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해 보겠다고 생각하며 돈을 내놓는다.
경호와 민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정을 일체 털어 버리려 했고,
무척 노력한 끝에 이제는 그것에 성공을 했다고 자신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극의 요점은 돌아온 아버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
즉 핏줄이라는 것을 끊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부자간의 관계가 강력하게 제기된 작품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름대로 몇 가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부자간의 관계(특히 큰아들과 아버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피치못할 관계라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아무리 부인(否認)에 부인(否認)을 거듭해도 혈연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경호는 최종수를 아버지로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는 암으로 여생을 얼마 남기지 못하게 된다.
경호의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수용에는 단순히 핏줄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애정,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의 포용성이 담겨져 있다고 보여진다.
이 작품에서 피는 자연적, 운명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나를 낳아준 부모이지만 그들이 부모로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단지 혈연만으로 부자지간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우선 가족의 개념으로 사회학에서 일반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어버이와 자식,
부부 등의 관계로 맺어져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함께 하는 집단'이란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과 일치한다.
그의 가족개념의 상징적인 작품으로
이 작품과 주제가 거의 비슷한 작품인 '가족'에서도 아직 핵가족 제도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로써 50 ∼ 60년대 초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채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가족개념은 60년대에 와서 그 범위가 상당히 확대되고 내용도 확장된다.
이 때의 상황을 이해해 보고 싶어서 다음에는 그의 또 다른 작품 '가족'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