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성(城)'을 읽고
「황순원」 장편문학 중 여섯 번째로 발표된 이 소설은 그의 가장 완숙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써
1968년부터 잡지 「현대문학」에 연재되던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반만년간 한반도에 정착해온 문화민족으로 자처하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성질을
유랑민 근성으로 보고 이를 '움직이는 성'이라 규정한다.
성(城)이란 원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 및 그 문화의 지속과
발전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착하지 못한 유랑민들에게는 그들 고유의 성(城)이 없다.
외부적으로 몸을 의탁할 성(城)을 가지지 못한 그들로서는 떠돌아다니면서 몸에 밴 근성,
말하자면 유랑민 근성이 성(城)의 구실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즉 '움직이는 성'이란 유랑민 근성의 비유인 것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농학연구가 '준태'는 전에는 여고 교사였으며,
어릴 때부터 가난 때문에 숱한 굴욕 내지는 모멸감을 느끼며 자란 인물이다.
자기 속에 존재하는 유랑민 근성을 혐오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결혼도 하고 집도 있고 직장도 있었지만 그 모든 '정착생활'을 미련없이 버리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도처에서 유랑민 근성을 발견하고
한민족 특유의 성질을 우리의 숙명적인 유랑민 근성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준태' 역시 어쩔 수 없는 유랑민인 것은 그의 천식 발작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는 그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인 '지연'과의 사랑의 확인이나 그녀 아버지와의 따스한 해후 다음에
일어나곤 하여 그는 자신이 결코 정착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리란 것을 깨닫는다.
조화를 잃은 듯한 그의 모습에는 늘 유랑민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
'성호'는 '준태'와는 달리 근원적인 유랑민 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혐오스런 근성조차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신념처럼 믿고 있다.
그가 신학을 택한 것은 전에 사랑한 목사 부인과의 불륜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목사부인 '홍여사'와의 관계가 교회당국에 알려지자
여지껏 몸담고 있던 목사직을 전혀 집착없이 떠난다.
그가 원한 것은 결코 기독교의 명분이나 제도는 아니었다.
목사의 장성한 아이들의 폭로에 의해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되돌아간 그는
병약한 아내에게 매질을 해대는 재일교포 청년을 말리기도 하고,
온 몸으로 살아가는 거리출신의 여자들일지라도 그의 판잣집 방안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주기도 하며 조용히 사랑을 베푼다.
'준태'는 끝내 정착생활을 이룰 수 없는 유랑민의 슬픈 숙명을 안고 세상을 떠나지만
우리는 '성호'를 통해 유랑민 근성을 벗어날 수도, 또 준태가 그토록이나 혐오하던
그 근성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또 한 사람, '성호'와 '준태'의 친구인 민속학자 '민구'는 이른 바 전형적인 유랑민이다.
그는 부유한 장로의 딸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정열을 다 기울인 무속 연구에서 손을 뗀다.
약혼녀가 무속연구에 일일이 제약을 가할 것이 귀찮아 장래 장인의 제약회사에나 몸담아 볼까 하는
그의 생각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는 유랑민의 그것이다.
유랑민 근성에 대한 논의는 주로 '준태'와 '성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테마를 위의 세 사람 각각의 뚜렷한 성격 속에서
어떻게 처리하느냐와 앞서 잠깐 비친 유랑민 근성의 극복에 대한 암시이다.
이는 '성호'의 태도에 비추어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준태'와의 정착된 사랑에 실패하고 그의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지연'이 '성호'의 동반자로서
함께 사랑을 행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