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선의 ‘낯익은, 목소리’
백종선의 ‘낯익은, 목소리’를 읽고
백종선 작가의 ‘고양이에게 말 걸기’ 중 세 번째 작품인 ‘낯익은, 목소리’…, 언젠가 영화에서 본 듯한 제목이다.
‘낯이 익은 목소리’라면 문법적으로 맞지 않을 듯도 하지만, 두 단어 사이에 쉼표가 찍혔다.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며 첫 페이지를 여니 금방 눈에 잡힐 듯한 아파트 창문이 보이고,
창문 밖으로 이파리가 살랑대는 녹보수나무를 바라보는 중년 여인의 자태가 두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노부부…,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한가로운 하루를 보내는 여인…,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조용한 침묵을 깨고 전화벨이 울린다. 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여보세요! 큰일 났어요. 재희가 응급실로 실려 갔대요.’
전화 한 통화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여유로운 일상의 평화가 깨어진다.
병원 간호사로 근무하던 ‘재희(며느리)’가 근무 도중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중년 여성의 일상이 흔들린다.
대기업 식품회사 전무로 명예퇴직을 한 남편은 시시 때때 백수 특유의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내의 일상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들은 대기업에서 퇴사 후 시청 환경설비업체 관리팀장으로 재취업했지만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이사비용으로 준비해 둔 전세자금 1억여 원을 탕진하고, 아내와 갈등에 빠진 지
3년째…, 불면증으로 졸피뎀(수면제)을 상습적으로 복용한다.
부모의 입장으로 이런저런 꾸지람과 조언을 해보지만 아들은 잔소리로 치부하며 들질 않는다.
다급한 아들의 전화 목소리를 거부하지 못하고 급히 장을 봐서 아들 집으로 향한다.
외출 중인 남편에게 알리고 싶어도 놀랄까 싶어 메모만 남겨놓았다.
아들의 집에 도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 주인이 없는 집안 풍경은 마치 이사가기 직전의 어질러진 모습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손자는 엄마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인사를 하는둥마는둥 자기방의 물건에만 관심이 있다.
중학교 1학년인 손녀 역시 늦은 시간에 들어와서는 제 방을 확인하고는 아빠에게 들었다며
엄마의 입원소식을 전하고는 피아노학원에 간다.
며느리를 입원시키고 온 아들 역시 두유 한 잔을 마시고는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아들의 뒷모습에서 쓸쓸함과 처량함이 보여 콧등이 시큰하다.
‘며느리(재희)’가 입원하자 어쩔 수 없이 아들 집에 머물면서 아들과 손주들을 돌보며, 가끔씩 남편과 며느리의
투정까지 받아야만 하는…, 손주들은 부모들의 문제에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문제-좋은 휴대폰, 간식거리,
게임-에만 관심이 있다.
재희(며느리)가 없는 집안은 엉망으로 어질러졌고, 누구도 정리나 청소하려는 이가 없다.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과 손주들의 투정을 마냥 나무랄 수도 없는 입장…, 꾸중을 하면서도
한편 안쓰러운 마음이 크다 보니 저절로 우울감이 겹치고 그에 따라 불면의 늪에 빠져 자율최면을 걸어
어쩌다 잠이 들면 커다란 코끼리에 쫓기는 꿈을 꾼다.
아들은 아들 대로 바쁘고, 손주들은 할머니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제 할 일에만 신경을 쓰며
꼬치꼬치 할머니를 귀찮게 한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퀭한 눈으로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려 쌀독을 확인하니 쌀독이 비어 간다.
아들이 출근한 후 집안 청소를 하려는데 시력도, 청력도 비정상적이다. 갑자기 우울감이 몰아닥친다.
남편에게 전화가 와도 무시한 채 폰음악을 켜놓고 기분 전환을 해보지만 별 효과가 없다.
그때 울리는 사이버 남자친구의 문자메시지 알림음…, 닉네임 ‘불루 드레곤’…, 시답잖은 대화로 그저
흘려듣고 넘기지만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사이버 친구에게 투정을 부리며 나름 기분전환을 한다.
하루하루의 일상이 다르지 않다. 아들이 출근하면 집안 청소하고, 손자손녀들 뒤치다꺼리와 투정을 들어주고,
가끔씩 사이버 친구와 메시지 주고받고…, 하루는 남편이 아이들 돌보느라 고생한다고 옷을 사 줄 테니
롯데마트로 나오라는 전화가 왔지만 무시한다.
삶에 자신을 잃은 듯한 아들을 이리저리 달래보기도 하지만 별 효과가 없는 듯하고, 부모의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자는 휴대폰이 고물이라서 되질 않으니 다시 사 달라고 조르다가 냉장고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없다고 투덜대고, 휴대폰 베틀게임에 빠진다.
화를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뺏어 창밖으로 내던진다. 손자는 악다구니를 쓰며 대어든다.
이를 지켜보던 아들이 ‘할머니에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회초리를 들고 손자를 훈계한다.
어쩔 수 없이 손녀 방으로 가서 잠을 청하려는데 사이버 친구의 카톡 문자가 뜬다.
‘불루 드레곤’…, 조금은 진한 육담을 늘어놓는데도 싫지가 않다. 문득 어떤 사람일까?
궁금증이 드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며 잠을 청하는데 손녀가 악몽을 꾸는 듯 신음을 토한다.
손녀의 잠자리를 보살피노라니 동녘이 훤히 밝아온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고달픈 삶의 연속…, 그렇게 생활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의사는 퇴원하기 이르다고 했지만 아내의 이른 퇴원 소식에 아들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면회실에 나타난 재희(며느리)가 아들을 향해 ‘하필이면 샤워시간에 면회를 온 거냐?’고 투덜댄다.
속으로는 ‘아픈 게 유세냐!’ 하고 고함을 치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다독이는데 갑자기 재희(며느리)가
남편이 아들을 폭행했다고 투덜거리며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하더니 눈물을 훌쩍인다.
속으론 울화가 치밀었지만 환자 입장을 이해하며 속앓이를 한다.
다음날…, 재희(며느리)가 퇴원을 하자 아들이 집으로 데려다준다. 집의 문을 열려는데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썰렁하다.
남편에게 온도를 높이라고 한 뒤 샤워를 한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난방비 많이 나온다고
빈정댄다. 그런 남편이 마치 괴물처럼 느껴진다.
서재에 전기장판을 깔고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며 창밖 녹보수를 바라보는데
어김없이 날아드는 ‘낯익은, 목소리’….
‘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고난의 시작이 있으면 마침내 고난의 끝이 있습니다.’
뭔가 여운이 실린 듯싶기도 했으나 조금은 싱겁다. 이렇게 이 작품이 마무리된다.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 출가시키고 노부부가 살아가는 삶, 그저 누구나 느끼는 평이한 삶이다.
그런데 가족을 구성하는 누군가가 사고를 당한다거나 병을 앓는다면 온 집안이 혼란스럽고
쑥대밭이 되는 것은 순간적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은 꼭 좋지 않은 일을 끼고 오며,
나쁜 일은 꼭 몰아서 오는 법이다.
나이는 들었지만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에서 갑자기 며느리가 병으로 입원을 한다면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특히 여성-어머니-의 입장이라면 누구나 주인공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자식과 손주들의 정상적인 삶을 돌볼 수밖에 없고,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자식과 손주들은 방관자적인
위치에서 자기 입장만 생각할 것이고, 며느리와 남편은 또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은 휴대폰 음악을 들으며 창밖의 풍경에 심취하는 것뿐,
다행히 사이버 남자친구와의 카톡 문자 대화라도 있었기에 심한 우울증을 떨쳐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이버상의 친구이기에 별도의 만남이나 오프라인 상으로의 연결은 없었지만 답답할 때
카톡 문자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공감이 간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타인의 행복을 잘 믿질 않는다. 전체를 보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을 뜻함이다. 그만큼 삶이 복잡해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렵다는 반증이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기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고, 하물며 지인(知人)도, 친지(親知)도,
부모형제자매를 비롯한 배우자와 자식까지도 흉금을 터놓고 의논할 수가 없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이나 사이버상의 대화를 이용하게 되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한다거나 이용당하는 등 부적절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한다.
세상이란 게 참으로 요지경인 듯…. 세상 사람들 누구나 말 못할 비밀 하나 가슴에 묻고 살고,
내려놓지 못할 고민 하나 등짐으로 지고 가는가 보다.
부자인 누군가는 걱정 없는 삶을 사는 듯싶어도 한 거플 벗겨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서 거기로 살고,
고위직의 또 다른 누군가는 떵떵 거리며 사는 듯해도 뒤돌아보면 이런저런 고민과 갈등으로 힘든 삶을 살아간다.
주인공이 겪은 간단한 일이 본인에겐 엄청난 고통이겠지만, 망원경을 들이대면 강 건너 불구경하는 꼴이요,
현미경을 들이대면 머리만 아플 지경….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
‘긴 간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있다. 나 아닌 누군가를 간병하고 돌보는 일…, 정말이지 쉬운 게 아니다.
자신의 몸을 간수하기도 힘든데 아무리 가족이고 자식들이라고 할지라도 어디 쉬운 일일까.
‘며느리(재희)’가 입원하자 한 달간 아들 집에 머물면서 아들과 손주들을 돌보고…, 며느리와 남편의 투정까지
받아가며 느끼는 우울감…,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이 겪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휴대폰 음악과 창밖의 녹보수 나뭇잎…, 간헐적으로 사이버 친구와의 카톡 문자를 통해 어려운 일상을
극복해 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요즘 세태의 현실인식과 함께 나 자신의 초상(肖像, portrait)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