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안의 작은 타임머신
탁자 안의 작은 타임머신 / 청송 권규학
한글날 연휴…, 남들이 말하는 '황금연휴'란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10월 들어 개천절과 한글날의 대체휴일로 인한
2주째 맞는 연속 3일 연휴…, 가히 말 그대로 '황금연휴'라고 할만하다.
계획 없이 무작정 '쉰다는 것'도 '무료함'과 '따분함'이다.
큰맘 먹고 집 안을 청소하기로 했다.
'봄맞이 대청소'는 흔히 들어봤지만
'겨울맞이 대청소'란 자주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이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혔다.
책장의 보이는 곳을 먼저 닦고, 꽂힌 책의 뒤편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읽다가 덮어둔 책과 잡지, 쓰다만 미완성 글의 습작 원고,
하물며 오래된 의약품(알약, 연고, 물파스, 립크린, 기타)에 이르기까지…,
그곳엔 내 삶의 희비(喜悲)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놀람'과 '기쁨'을 주는 대단한(?) 물건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일까?
책꽂이 책과 책 사이, 책갈피를 반쯤 벗어난 곳,
두툼한 하얀 봉투를 열자 자그마치 서른 분의 세종대왕(?)이 잠을 깼다.
뭘까..., 출처가 미심쩍은 성인(聖人)의 출현에 궁금함과 어리둥절함이 앞선다.
갸웃갸웃 도리도리 절레절레…,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 출처와 근거가 모호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지금에서야 오래전 별도의 경비로 챙겨둔 게 확인되었지만-
나이 들어 심해진 건망증 탓일까..., 아니면, 치매(?)라도 온 것일까?
어찌 되었든 30만 원이란 거금을 불로소득(?)으로 챙기고 보니 기분은 좋았다.
기쁨(?)을 잠시 미뤄두고 하던 청소를 계속했다.
책상과 소파, 다용도실과 발코니, 데크의 장롱 사이를 속속들이 쓸고 닦았다.
행여 신사임당(?)이 강림하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평소에 열어보지 않던 작은 탁자의 문을 여니 그곳에…,
마치 찾아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사각의 잿빛 VTR이 인사를 한다.
지금은 파산으로 그룹 자체가 사라졌지만,
한 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로 유명세를 떨친 '00그룹' 제품의 VTR이었다.
오랜 기억이지만 이 VTR을 구입하자마자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급속히 '아날로그 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는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몇 개의 VTR 테이프도 나란히 놓여있다.
청소를 마친 후 전원코드를 찾아 콘센트에 꽂으니 전원은 선명하게 들어왔지만
오래된 VTR과 신형 TV와는 맞지 않은지 영상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자제품에 폭넓은 지식을 가진 지인(知人)을 찾아 VTR과 TV를 연결했다.
사용 빈도로 보면 거의 신품(?)에 가까운 제품이었지만 오랜 세월 탓으로 늙어버린 듯
기술자의 손을 통해서도 쉽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질 않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치지직- 소리와 함께 영상이 뜬다.
테이프를 넣자 가족의 젊은 날과 함께 아이의 어린 시절이 나타났다.
참으로 재미있고 감동스러운 영상에 즐거워하고 기뻐했지만
모든 게 추억 속 기억의 한 장으로 묻혀버린 영상들이기에 아쉬움도 컸다.
오랜 물건에는 나름의 사연과 혼(魂)이 담겨있는 법이다.
그것도 남이 쓰던 물건이 아니라 옛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자신의 물건에는
남다른 정이 갈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30년이 넘게 지난 물건이라면 더...
작은 탁자 안에 잠들어있던 오래된 VTR 영상을 보며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3일의 연휴를 맞아 잠시나마 내 삶의 과거를 여행했다.
눈앞에 보이는 현금 앞에서 기뻐한 즐거움도 있었지만
기억으로부터 사라진 오랜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음이 더 큰 수확이다.
아무리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세월이라고 할지라도 타임머신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탁자 안의 작은 타임머신'을 타고 오랜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었음이 행복이었다.
천진난만한 표정에서 불혹을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을 찾을 수 있음이 나름 행복이라 할.
더불어 교통사고로 불편한 몸을 챙기며 살아가야 할 아이에게 신의 가호를 기원한다.
비록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마음으로나마 기도할 수 있음도 다행이리라.
자기 자신과 가족의 평안은 물론이려니와 자식의 행복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
어쩌면, 두 손 모으는 순간이 아닐지라도 모든 부모 된 자의 공통된 마음이려니.(2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