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바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독서에 대한 열의를 끊지 않고 틈틈이 책을 가까이했던 관계로
요즈음 들어 제법이나 많은 책을 읽은 것 같다.
정신없이 ‘바쁘다 바쁘다’를 연발하노라면 괜히 마음만 혼란스럽고,
그나마 야간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책읽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짜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특히 이 책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환경관련 분야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나름대로 많은 지식을 접할 수 있고,
또 남다른 감명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젊은 나이도 아닌, 이순(耳順) 훌쩍 넘긴 나이에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취미생활이면서도 그 취미생활을 지속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은 듯 싶다.
책읽는 것이 생업(生業)을 위한 호구지책(糊口之策)의 길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기에 꾸준히 책과 씨름을 하기란 여간 모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책을 읽고, 또는 그 책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소감이나 감상문을 쓴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만하다.
이 책…,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약간은 딱딱한 듯하면서도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
가다보면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 딱딱함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있다.
특히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의 ‘생각을 실천’하는 모습에서
새삼 나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듯 하다.
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知人)으로부터 좋은 책이라는 소개를 듣고,
그 지인(知人)의 레포트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읽게 되었다.
‘삶과 철학’이란 과목의 레포트 주제가 환경에 관련된 영화(또는 책…)나 소설을 보고(또는 읽고…)
소감이나 감상문을 쓰는 것이라기에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현재 나의 삶 자체가 너무도 분주하고 바쁘다보니 과연 영화를 볼(또는 책을 읽을…)만큼의
여유로움이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인터넷의 웹사이트를 비롯하여 가까운 도서관과 인접한 책방을 찾아
관련 자료를 열심히 뒤진 끝에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란
소설 작품을 찾아내어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953년도에 발표된 후 전 세계 13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으며,
애니매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이 감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개략적인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
『숯을 구워서 파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지쳐 있었고, 또한 그 마을의 분위기도 황량했다.
이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미움으로 살인이 빈번하게 자행되었고,
마을 전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보다는 절규와 고함 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 황무지를 지나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라는 양치기를 만나게 된다.
그는 처와 자식을 잃고 산골짜기에서 홀로 양을 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저녁은 말없는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가 잠들기 전까지 하는 일은 아주 잘 여문 도토리를 골라 따로 분리해 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양치기를 보면서 평화를 느낀다.
다음 날 양치기를 따라가며 산책을 하던 ‘나’는 그가 허리를 굽혀 황무지에
상수리 나무를 심는 것을 보았다.
어젯밤에 골라 놓은 100개의 좋은 상수리를 땅 속에 하나하나 심고 있었다.
그는 그 동안 10,000여 그루의 상수리를 심었다고 했다.
그 중에서 몇은 죽고 몇은 살아남아 자그맣게 황무지에 점점이 박혀있었다.
황무지는 그의 땅도 아니고, 누가 그에게 나무를 심으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지만,
양치기는 양을 돌보는 내내 도토리나무를 심는다.
‘나’에게 그런 양치기의 모습은 좀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강요하지도 않고 보수도 없는 일을 왜 하는 것인지…,
‘나’는 그곳을 떠나 1,2차 대전에 참가하게 되고, 그 사이 찾아가 본 노인의 황무지는
상수리나무와 다른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었고,
그 노인은 더 이상 양을 키우지 않았다.
양이 자라나는 나무를 짓밟았기 때문에 양을 키우는 대신, 양봉을 하고 있었다.
계곡에는 자작나무를 심었고, 너도밤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
그곳은 1․2차 세계 대전 속에서도 지켜졌고, 그것은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의
부단한 나무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한 사람의 노력으로 황무지는 울창한 숲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사람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숯을 구워 파는 것이 금지되었고, '부피에'는 그 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게 끝이 난다.
핵심 줄거리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우리들에게 남다른 느낌과 감동을 준다.
이 책을 통해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의 ‘삶의 철학'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생각을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메마른 황무지를 비옥한 토지로 만들고, 도토리 씨앗을 정성스럽게 골라내어
자신의 평생을 심었으며, 기르고 있던 양이 나무에 피해를 줄까봐서 벌통으로 바꾸기까지 했으며,
큰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할 일만을 향해 꾸준히 나아간다.
몇 십 년이 지난 후 그의 그런 작업은 나무가 더욱 무성해지게 했고, 개울이 생기고, 물이 흐르며,
그런 환경을 찾은 사람들이 하나의 행복한 마을을 만든다.
그의 나무를 심는 하나의 행동이 연쇄적 영향을 일으키며,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바이러스를 심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주인공을 따라 떡갈나무 숲과 노인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 역시 주인공처럼 산으로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산을 여행하다가 길을 잃어 하루 종일 산을 돌아다니는 모습…, 물이 마시고 싶어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 ‘그가 이러다 쓰러지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도 느껴졌다.
만약 그때 그가 양치기 노인을 만나지 못해 물을 얻어 마시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이 글에 나오는 양치기 노인은 정말로 인정이 많고,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내 사는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복잡한 시장골목에서 생선을 팔고, 야채와 과일을 팔고 있는 연로한 아주머니들…,
춘하추동 아무런 불평없이 주어진 생업(生業)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에게서
정말 침범할 수 없는 경외감(敬畏感)을 느낀다.
나 역시 내 삶의 어려움을 불평하지 않고 이 책의 주인공처럼…,
또는 시장사람들과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싶고, 또 그들의 꾸준함을 배우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현직에서 은퇴한 지금 어느 조용한 시골의 둔덕에
함초롬한 보금자리를 지어놓고 소박한 나만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싶다.
‘일년지계는 막여수곡(一年之計 莫如樹穀)'이요,
‘십년지계는 막여수목(十年之計 莫如樹木)'이요,
‘백년지계는 막여수인(百年之計 莫如樹人)'이라고 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敎育 百年之大計’라고 하는데
하나뿐인 내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곡식을 심어 일년을 가꾸고,
10년 앞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 대계를 내다보며 내 아이를 키우고 싶다.
현재 내 삶의 근간을 이루는 이 공직생활이 마무리될 때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아내의 일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인 즉,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욕심을 버리면
그곳이 바로 행복 가득한 천국일 것이다.
명예욕과 재물욕, 그리고 숱한 욕심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도 욕심들이 많다.
하지만 인생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임을 깨닫는다면
삶 자체가 바로 행복임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임어당이 ‘인간의 행복지수 = 성취 ÷ 욕망’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삶도 이미 이순(耳順)의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든 사람’이 되어야 할진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든 사람’이나 ‘된 사람’보다는 ‘난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남들보다 한 단계 위에 올라서고 싶은 욕심...,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어하는 마음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소유욕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인간이란 건 ‘내 것’이라는 소유감을 가지면서 더 행복해하는 것이 사람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땅에 나무를 심고, 나무 하나의 생명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남에게 과시하고 ‘자기 것’이라는 소유를 충족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는 어느 곳에 심어도
나무 하나 하나의 생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자신이 심은 나무로 인해
자기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는 땅의 주인을 고려해서 행동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생명을 창조하는 일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는 ‘자원봉사적 측면’에서의
‘자원봉사 정신’과 ‘환경적 측면’에서의 ‘헌신적인 끈기’를 몸으로 가르친다.
‘자원봉사는 무엇인가’에 대해 몸소 보여주는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를 통해
자원봉사자에 대한 자세를 배울 수 있으며,
과연 어떤 사람이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헌신적인 끈기’라는 소개 글에서 우리는 자원봉사의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으며,
‘이 땅이 당신의 땅입니까’란 물음에
‘아니다. 누구의 땅인지 모른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다’라는 말에서는
‘자원봉사의 무보수성과 자발성’을 배울 수 있다.
‘나는 50살이 넘은 사람은 죽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허나…’라는 대목에서 자원봉사는 연령과 직업, 신분, 성, 그밖에 경제적 여건에 따라서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것이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그리고 노인이라고 해서 자원봉사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가진 것이 없어서 베풀지 못한다’는
나의 변명아닌 변명이 스스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의 헌신적인 끈기는 그가 바라지도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을을 ‘희망의 땅’이라 부르며 찾아들게끔 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연대성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에서 ‘나무를 심은 사람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감을 적어보았다.
요즘엔 왠지 책을 읽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인(知人)의 부탁(?)이 없었다면
이 책을 읽기란 감히 엄두도 못낼 그런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서나마 이렇게 좋은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장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란 책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지식을 경험케 했다.
첫째로 자연 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이었다.
주로 숲이 이에 해당한다.
나무가 모인 숲은 산새들과 여러 야생동물들을 불러들인다.
숲은 이들에게 아늑한 보금자리를 주기 때문이다.
숲은 비바람과 천둥번개 그리고 따가운 햇빛까지 막아주는 최고의 터전이다.
그렇다고 동물들에게만 이러한 것을 주지만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도 평등하게 똑같이 제공한다.
인류의 기원이 원숭이이듯이 인간은 자연에 돌아갔을 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 예로 사람들의 산림욕을 들 수 있다.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잠시나마 나무와 숲 흐르는 물과 자연환경을 감상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지며 평온이 찾아옴을 느끼게 된다.
‘나무를 심은 사람들’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위를 온통 덮은 무성한 나무들과 지저귀는 산새들…,
그리고 졸졸졸 흐르는 개울과 팔랑대며 날아다니는 나비,
엄마 품보다 더 넓은 대자연을 뛰노는 아이들, 함박웃음 바이러스를 앓게 되는 사람들…,
이들의 얼굴에는 모두 해맑은 미소가 스며져 있었다.
이처럼 자연…, 즉 숲은 인간이나 동물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다.
두 번째로 봉사정신이다.
점차 물질만능주의의 팽배 속에 물들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봉사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나’는 50살이 넘은 늙은 사람은 죽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의 두 손에 의해 잘 가꾸어지고 다듬어진
드넓은 산과 들을 보며 곧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50이 넘은 나이의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를 통하여
어떠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 어떠한 사람이란 정해져있지 않았다. 아무런 조건도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세 번째로 헌신적인 끈기와 희생정신이었다.
‘나’는 파괴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인간이 신보다 유능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는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말없이 대신 수행하고 있는 ‘충실한 하느님의 일꾼’임을 느꼈다.
전쟁도…, 세월도…, 그 무엇도 그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위의 모든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다.
사람들이 다시 생겨난 숲과 초원,
개울이 서서히 일어난 변화라고 생각을 해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에는 누구에게 칭찬을 들을려고
나무를 심은 것도 아니었고, 어떤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독한 한 명의 노인이 그곳을 생명력 넘치게 만들었다.
공기와 바람이 바뀌고 개울이 흐르고 샘 옆에는 부활의 상징인 보리수도 자라난다.
산과 언덕은 자연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고 희망이 가득했다.
모두가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가 이루어 놓은 자연에 매료되었다.
그는 헌신적인 끈기와 자기희생으로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절망과 싸워 고독 속에서 묵묵히 그것들을 이루어 낸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도 어렵고 힘들게 이 책을 모두 읽었다.
처음엔 읽기가 힘들고 어려워서 중도에 포기하지나 않을까 싶었지만
수박겉핥기식이나마 모두 읽은 지금은 매우 흡족함을 맛본다.
특히 요즘엔 환경에 대한 심각성에 대한 많은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전세계 반 이상의 산소를 공급하는 ‘아마존 개발 문제’를 포함하여
환경보존에 관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 2면에 걸쳐 할애되고 있는 우리 국토의 환경파괴에 대한 내용도
너무 심각하고, 넋놓고 방관만 하기에는 피부에 와닿는 생활의 피해가 심각하다.
이젠 우리 사회와 인간과 더불어 생각해야 할 시급한 분야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意味)에서
이 책 ‘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느낌과 깨달음을 준 듯 하다.
황폐한 환경…, 사람들의 이기심(利己心)과 난폭함이 증가하는 그 곳.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에서는 결코 미래(未來)의 꿈은 찾아 볼 수 없으리라는 말에 동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