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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역사비평사)의 '광해군(光海君)'
靑松 권규학
2017. 7. 22. 22:32
한명기(역사비평사)의의
'광해군(光海君)'을 읽고연산군과 함께 조선의 역사에서 폭군으로 기록된 조선조 15대 임금인 '광해군(光海君)'...! '광해군(光海君)'은 과연 폭군(暴君)이었던가...? '광해군(光海君)'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폭군(暴君)이 아니었다. 아니, 폭군(暴君)이라기보다는 민초들의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여 나라의 미래를 바로 잡으려는 진정한 군주(君主)였으며, 조선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은 성군(聖君)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임금이었다. 이런 '광해군(光海君)'의 진면목을 일깨워 준 것이 바로 이 '광해군(光海君)'이란 책이다. 가을이 가기 전에 손에 잡은 이 책..., '광해군(光海君)'을 통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폭군 광해군(暴君 光海君)'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천명을 눈앞에 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떤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 처음엔 나의 뇌리 속에 꽉 들어찬 '폭군'이라는 정형화된 틀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책 속에 등장하는 '광해군(光海君)'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정확한 인물설정이 무척 혼란스러웠고, 또 요즈음 SBS에서 월화드라마로 방영하고 있는 '왕의 여자'란 드라마에도 '광해왕자(光海王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현 시점에서 무척이나 묘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 광해군(暴君 光海君)'과는 거리가 먼..., 뭔가 '광해군(光海君)'의 긍정적인 측면을 조명한 것 같은 이 책에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즉위 초의 '광해군(光海君)'은 조선의 역대임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영민(英敏)한 성군(聖君)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힘없고 나약한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광해군(光海君)'의 모습..., 시대상황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나라의 기강을 세워나가는 그에게서 진실로 아름다운 군주(君主)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27명의 왕들 중 이렇게 백성을 위해주고, 사랑했던 왕을 찾아보기도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흔히들 우리의 역사에서 태평성대라 함은 왕권이 안정되고, 지배층들이 살기 좋은 시대를 말했을 뿐이다. 새롭게 조명된 '광해군(光海君)'에 대한 평가는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이 나라의 문제점을 똑바로 본 개혁군주'였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때부터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광해군(光海君)' 역시 연산군과 같이 폭군정치를 하다가 폐주(廢主)가 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것은 패자(敗者)의 입장에서 기록한 역사의 일부분이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한 때, 국사선생님이 우스개 삼아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연산군은 머리가 나빠서 쫓겨났고, 광해군은 머리가 똑똑해서 쫓겨났다'는 그 말씀이 지금에서야 이해될 듯도 하다. 비록 수백 년이 지난 후세의 후손들이 내린 평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새롭게 평가하고 자신의 실제를 바르게 알아주고 섬기는 후손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 '광해임금(光海王)'의 복(?)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음이리라. 나 역시도 늦은 감은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임금으로서의 '광해군(光海君)'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광해군(光海君)'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이지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현실을 직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으로서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광해군(光海君)'의 신분은 선조의 서자(庶子)로서, 그것도 첫째 왕자도 아닌 둘째 왕자였다. 결국 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의 피말리는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그는 자신을 왕위로 올릴 수 있는 아무런 뒷 배경조차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학문과 비상한 머리, 그리고 인내와 끈기로 자신의 꿈에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특히 '광해군(光海君)'은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을 직접 보고, 느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백성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조그만 약속까지도 지킬 줄 알았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부정부패(否定腐敗)와 대의명분(大義名分)만을 내세우는 신하들은 자신의 이익을 좀더 늘리기 위해 '광해군(光海君)'의 목을 움켜쥐었으며, 신하들과의 투쟁에도 힘든 그는 결국 자신의 부인에게도 버림을 받는 등..., 군신(君臣) 간 이권다툼의 절정기에 이르러 결국 인조반정으로 혼자 고립된 궁궐 속에서 패자(敗者)의 멍울을 뒤집어 쓴 채 폐출되고 만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 백성을 사랑하고 앞일을 예견한 현실적인 군주(君主)였던 '광해군(光海君)'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도 못한 채, 그를 따르는 신하가 없음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비참한 말로를 지낸 것이다. '광해군(光海君)', 그는 누구인가 ? 그는 이 나라의 현실을 똑바로 내다보며 중립외교를 펼쳐 나라 안으로는 피폐된 국토와 민심을 바로 잡고, 나라 밖으로는 명과 후금의 외교에도 힘써, 이 나라를 지키려했던 사람이었다. '광해군 시대(光海君 時代)'보다는 7대가 늦은 시기이지만 22대 왕인 정조대왕이 노론·소론의 권력다툼에 의해 독살됨으로써 그가 바라던 개혁정치를 완수하지 못했듯이 만약 '광해군(光海君)'이 인조(仁祖)에 의해 폐주의 누명을 쓰고 폐출되지만 않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 명(明)이 멸망하고 청(淸)이 들어선 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앞장섰을 것이고, 백성들의 민생안정과 왕권강화를 이루어냈다면 우리의 국치(國恥)인 정묘·병자호란이나 일제 식민지 지배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점을 알고 고치려 했던 사람...! 개혁정치를 이루려했던 '성군 광해군(聖君 光海君)...!'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정 꿈을 꾸는 자는 죽는 것인가 ? 아니, 그렇지가 않다. 비록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광해군(光海君)'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패자(敗者)의 역사에 씌여진 '패륜아(悖倫兒)'와 '폐주(廢主)'로서의 '광해군(光海君)'이 아닌,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한 진정한 '성군'(聖君)으로서의 '광해군(光海君)'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