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서 평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靑松 권규학 2017. 7. 19. 23:40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작가 「헤르만 헤세」는   독일의 시바벤 지방 카르부에서 출생했으나 
    스위스 국적을 가진 소설가이다.
    목사인 부친과 선교사의 딸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평화주의에의 지향과 
    동양종교에 관심을 가졌고, 어려서 수도원 부속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시계공장의 견습공, 서점 점원을 하면서 독학했다.
    바젤(Basel)대학에서 청강으로 문학을 공부한 그는 22세 때 처녀 시집 '로맨틱한 노래'를 출판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산문집 '한 밤중의 한 시간'을 통하여 '릴케' 등에 의해 인정받게 되었다.
    그가 추구한 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는 양면성을 발견하고 
    그 존재를 다같이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통일과 조화로 이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토마스만'과 더불어 현대 독일의 최대작가인 그는 1946년 20세기의 문명비판서라고 할 
    미래소설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패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아래서', '방랑',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싯달타', '데미안', '나비' 등이 있다. 
    슈바르트 발트의 작은 마을에 사는 '한스 기벤라트'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소년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때문에 낚시, 수영 등의 소년의 놀이는 금지되고 
    그리스어, 라틴어 공부를 밤늦게까지 함으로써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주 시험에 합격해서 휴가를 맞이하고서도 목사와 교장선생은 예습을 강요하여 
    '한스'는 늘 두통에 시달린다.
    신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던 '한스'는 시를 쓰는 자유분방한 '하일너'라는 소년을 만나 
    가깝게 지내게 된다.
    그는 이미 자기 나름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어 '한스'와는 대조적이었으나 '한스'는 
    '하일너'와의 우정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하일너'와의 교제로 시간을 낭비해 성적이 떨어지자 교사들은 
    '하일너'와의 관계를 떼어 놓으려 한다.
    '하일너'는 신학교를 탈주하여 퇴학처분을 당하지만 
    '한스'에게 있어 '하일너'는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는 중에 '한스'는 피로를 심하게 느끼게 되어 몸과 마음이 지치는 신경병에 시달린다.       
    결국 '한스'는 요양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로 신학교를 나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늦가을 어느 날 '엠마'라는 한 처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엠마'에게 있어 '한스'는 연애 장난 상대에 불과했다.
    '엠마'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자 희망을 잃은 '한스'는 기계 견습공이 된다.    
    그러던 중 옛 친구였던 기계공 '아우구스트'의 꾐으로 소풍을 가서 슬픔을 잊게 되지만 
    곧 깊은 환멸에 빠지게 된다.         
    이튿날 '한스'는 강변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발견된다.
    이 작품은 한 소년의 인간성이 명예심과 규격화된 인물을 만들려는 교육제도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인간에게는 감성적 자아와 이성적 자아가 있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들에게 단지 이성적 자아의 성장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규격화되고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며 
    단순한 지식과 산수문제를 푸는 능력만을 지닌 인간을 육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한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주 지쳐 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 말을 하고 있는 교장 선생님도 공직이라는 
    수레바퀴 아래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천재에 대하여 아주 재미있는 말이 나온다.
    '교수들에게 있어 천재라고 하는 것은 교수를 존경하지 않고, 열네 살에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고, 
    열다섯 살에 연애를 시작하고, 열여섯 살에 술집엘 가고, 금지하는 책을 읽고, 
    대단한 작문을 쓰는 것이었다.
    때로는 선생들을 조롱조롱 쳐다보며 교무실 일지 속에서는 
    선동자와 감금 후보자의 역할을 하는 불량배인 것이다.    
    학교의 교사는 자기가 맡은 학급에 한 사람의 천재를 갖느니 보다는 확실성이 보장되는 
    열명의 바보를 갖는 것을 좋아한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교사의 임무는 정상을 벗어난 인간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를 잘하고 계산에 능하고 
    성실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볼 때,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규격화된 생활을 훌륭히 수행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요, 자기 멋대로 천재적인 문제아로 
    성장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생에 있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내 외적 자아, 즉 자기충실에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