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서 평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靑松 권규학
2017. 7. 19. 23:04
구효서의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를 읽고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이 매우 신선했다. 그동안 일상적인 삶에 찌들어온 나의 영혼을 충분히 자극시킬 만한 제목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또한 군 부대 내의 저격사고를 다루고 있다는데 대해 남다른 관심과 흥미를 가지기에 충분했다. 작가 「구효서」의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에 실린, 같은 이름의 소설은 어떤 죽음에 관한 '하나의 보고서'이다. 여기서 '보고서'라는 말은 비유적으로 쓴게 아니라 말 그대로 보고서라는 뜻으로 쓴거다. 그리고 '하나의'라는 말은 여럿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부대 안에서 벌어진 한 병사에 대한 저격사건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어떻게 진행될까 ? 진행되지 않는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진술들만이 보고서를 뒤덮고 있을 뿐이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보고서는 사후에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에 나타난 보고서의 진술들을 통해 그 속에 뒤섞여 있는 사건을 재구성해 볼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설명은 관 속에 든 시체처럼 뻣뻣하게 보고서 안으로 넣어진다. 다시 말해 저격자가 있었고 피격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사고원인은 무엇인가 ? 사고원인은 피격자의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던 것으로 정해지고 첨부된 모든 진술서들이 이를 증거한다. 피격자가 했던 비상식적 행동을 증거하는 내용을 예로 들어보면, '확성기다 ! 국민학교에도 확성기는 있다 ! 송하사님, 확성기예요, 확성기, 니미랄, 확성기라구요. 내가 그 생각을 왜 진작 못했을까. 맞아요. 중학교에도, 고등학교에도, 동사무소 경찰서 아파트 단지 소방서 병원 지하철 아아 연락선 뱃머리에도..., 온통 확성기 잖아요. 괴물의 부릅뜬 눈깔같은 확성기. 하루 24시간, 일년365일, 줄창 노려보고 째려만 봐서 눈동자가 대가리 처럼 툭 튀어나온 저 확성기. 확성기는 왜 줄창 가장 높은 곳에만 매달려 있는가 ?' 여기서 확성기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의사소통의 일방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다. 확성기는 입은 있지만 귀는 없기 때문이다. 확성기는 줄창 높은 곳에만 매달려 소리지르면서 모든 사람들을 듣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확성기를 통해 나온 말은 말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말이라고 보고 있다. 확성기를 통해 나온 말은 이제 진리가 되고 군대이기 때문에 명령이 된다. 피격자는 이러한 확성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것이다. 즉 피격자는 더 이상 듣는 사람이 아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일방향적인 의사소통의 수행자는 확성기만이 아니다. 보고서 또한 그렇다. 보고서에 수많은 진술자의 이름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보고서를 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서는 깔끔하게 완성되어 상관의 결재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진리가 된다. 누군가 사건의 참 모습을 알고 싶어해도 그는 사건 대신 사후에 공식적인 진리로 확인된 보고서만을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한가지 의구심을 가졌다. 왜 작가는 소설을 '보고서'의 형식을 빌어 썼을까 ? 그는 소설도 어쩌면 확성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 아니면 소설이 가진 확성기의 모습을 반성해 보기 위해 이런 소설을 쓴 것은 아닐지...? 추측만 무성하다. 하지만 확성기에 틈새가 있다고 작가는 말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확성기에서 나오는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 사이로부터 피격자의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게 된다. 피격자의 죽음을 정당화하고 있는 보고서의 논리는 이런 틈새로 균열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또한 작가가 의도했던 바가 아닐까 ? 소설을 보고서로 쓴 것이 소설에 대한 반성이라면, 보고서로 소설을 쓴 것은 소설이라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보고서를 반성케하고 보고서의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닐까 ? 보고서를 다 읽게되면 확성기와 저격병이 동일함을 알게 된다. 피격자가 어떤 괴물에 의해 저격당한 것이다. 이 괴물은 귀도없이 확성기만 입으로 가졌다. 괴물은 뛰어난 사격솜씨를 지녔다. 확성기로 처리하지 못하는 대상은 저격으로 끝장내 버린다. 우리들의 삶에 한 번 이 소설을 투영시켜 보면, 우리에게는 괴물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거나, 괴물을 향해 말하는 사람이 되어 죽어가는 길 밖에 없을까 ?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소설이지만 소설이라는 것이 실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허구로 끌어낸 것이라면 충분히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적으로 우리 군에는 석연찮게 끝맺은 많은 사건/사고들이 즐비해 있다. 말하지 않더라도 매끄럽지 못하게 종결지은 굵직굵직한 사건/사고들..., 김훈 중위 자살사건을 비롯한 공군 이병 자살사건, 그리고..... 군 조직 뿐만 아니다. 우리의 역사에 있어 의문의 사건/사고는 수도없이 많다. 여기에서 그 많은 사건/사고를 다룬다는 것은 원래의 목적에 어긋나겠기에 이 소설에서 강조한 '확성기의 틈새'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의 변을 남기며 읽은 소감을 마친다. 과연 우리는 '확성기의 틈새'에서 어떤 교훈을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