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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田園日記)6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습니다-

靑松 권규학 2015. 8. 24. 12:44

 

 

전원일기(田園日記)6 -농부는 땅을 탓하지 않습니다- / 청송 권규학

 

 

'전원(田園)의 꿈(夢)'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 지 어느새 반년이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고 시작한 지난 세월, 계절이 바뀌면서

농지(農地) 가득 농작물이 들어섰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자라났으니

결코 그 세월을 길다고는 못하더라도 짧다고 할 수도 없으리라.

상추와 도라지, 겨울초를 심어 씨앗을 보았고,

부추는 푸르게 푸르게 왕성한 성장을 하고 있으며,

느티나무, 모과나무, 대추나무, 음나무, 벚나무, 산딸나무, 회화나무,

그리고…. 무궁화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과 파고라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와

적(赤) 키위 넝쿨이 줄기차게 그 싹을 키워내고 있음만으로 충분하다.

가지와 오이넝쿨은 주말마다 풍성한 수확을 남겨주어 좋고,

가뭄에 많이 말랐지만, 청양고추도 이웃과 나눠 먹어도 남을 만큼

충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맥문동 약초도 보랏빛 꽃대를 예쁘게

피워주니 약초로서의 기대는 물론 눈요깃감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어디 그뿐이랴.

밭둑으로 줄기차게 뻗어나는 호박 덩굴에는 달덩이 같은

수십덩이의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고

고구마 넝쿨은 거칠 것 없는 왕성한 기운으로 주변을 장악한다.

다만, 극심한 가뭄에도 땅덩어리는 돌덩이가 되었지만

끊임없이 솟아나는 잡초들의 왕성한 궐기, 그들의 반항은 쉼이 없다.

6시 30분경,

동녘에 볼그란 태양이 고갤 내밀면 대지는 더는 일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폭염 속에서의 며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3~4시간 일을 하면

더는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마을에서는 오후 5시까지는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방송까지 한다.

허기진 몸에 잡초를 뽑다가 현기증에 실신할 뻔한 경험도 수차례다.

일 욕심에 자칫 잘못하다간 건강에 적신호를 받기까지 할 뻔.

쉽게 알았다가 큰코다칠뻔한 경험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이른 봄에 뿌렸던 상추에 씨앗이 소담스레 맺혔다.

씨앗을 채취하고 그 땅을 파헤치니 정녕 돌덩이다.

파종 시에 그렇게 많이 시비(施肥)한 거름기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영양을 충분히 섭취했기에 한 계절 우리에게 싱싱한 잎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찌 투자 없이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새삼 세상 만물에는 투자 없이는 성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는 걸 실감한다.

한련초(旱蓮草)도 마찬가지다.

가꾸지 않은 곳에는 온통 무성한 가지를 뻗쳐 기세를 올리면서도

정작 옮겨 심은 곳에는 뻣뻣한 줄기만 추켜세운 채 뻗어 나갈 기미가 없다.

채 줄기를 뻗기도 전에 하얀 꽃망울을 달기에 바쁘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를 일찌감치 직감하고 하루속히 씨앗을 퍼트리려는

한련초(旱蓮草)의 종족보존을 향한 나름의 지혜를 미루어 짐작한다.

 

이제 또 하나의 계절이 저물려고 한다.

폭염의 뒤를 따르는 선선한 기운, 이젠 무엇을 해야 할까?

여름 상추와 열무는 폭염으로 인해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렸는지

온몸에 구멍이 뚫려 자라날 기운마저 잃어버린 듯하다.

피폐해진 땅에는 거름을 충분히 줘야 한다.

서서히 나무와 농작물에 추가 시비(施肥)를 하고,

가을 무와 배추를 파종할 준비를 해야 한다.

땅을 일구어 거름을 주고 다시 파헤쳐 섞어서 씨앗을 뿌리려 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 정녕 그렇다.

내가 가꾼 만큼, 내가 정성을 쏟은 만큼 땅은 되돌려준다.

그 땅이 비옥하든, 황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비옥한 땅이면 행복이요, 비옥하지 않으면 비옥하게 만들면 된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으며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듯이

농부 또한 땅을 탓할 필요가 없다.- 초보농군이라면 더욱 -

오직 흐르는 땀방울로 땅을 적시면 그뿐이다.

그 땀으로 자라난 고추와 오이와 상추와 갖은 농작물을 먹고

스스로 자연과 동화되어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현직(現職)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 속에서 현직(現職)에 종사한다는 것은 참된 행복이다.

하지만 누구나 현직(現職)을 경험하고 현직(現職)에 머무르고 싶지만

그 현직(現職)이란 건 언젠가는 전직(前職)이 되고 만다.

새로운 직업으로의 전직(轉職)을 두려워하지 말고 집착 없는 삶을 살자.

이제 40년 가까운 현직생활을 접으려고 한다.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세월은 가고 더불어 나이를 먹는다.

더 머물 수 없다면 등 떠밀기 전에 미련 없이 떠나는 게 좋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정처 없이 하늘을 날아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땅(자연)에 구르자.

잘 살아도 그만, 못 살아도 그만인 게 우리네 삶이다.

태어날 때 자신은 울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내 목숨이 다해 세상을 떠날 때는

혼자 웃되 주위 사람 모두를 울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사람

술 한잔 나누며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이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 남길 수 있는 넉넉한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남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런 삶을 만들고 싶다.

 

문득 앞산 너머로 유성(流星)이 떨어진다.

마치 자연으로 돌아눕는 내 모습을 지켜보려는 듯

긴 꼬리를 그리며 흐르는 별똥별,

별똥별의 꼬리를 따라 앞산 봉우리 위에 내 남은 인생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남은 삶이 더 알차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실망이나 좌절 따윈 없을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눕는 지금의 결정에 한치 후회도 없을 테니까.(150824)